벨 앤 세바스찬의 리더 스튜어트 머독의 영화, [갓 헬프 더 걸]
글을 쓸 때면 항상 음악을 틀어놓곤 한다. 하지만 아무 음악이면 안 된다. 글 쓰는 흐름을 방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사람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는 연주곡을 중심으로 틀어 놓는 편이지만, 그건 너무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정말로 귀에 들리지 않는 bgm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요나 팝을 찾을 때도 있는데 그러면 이내 보컬이나 악기, 주로 기타나 드럼이 귀에 거슬리곤 한다.
그래서 다시 연주곡을 틀어 놓았다가 다시 대중 음악을 찾다가... 하는 일들을 반복하다가 아주 적절한 지점으로 발견한 음악이 있었으니, 바로 벨 앤 세바스찬(Belle And Sebastian)이다. 브릿 팝이라고는 하지만, 스코트랜드 밴드여서 그런지 그렇게 rocking하지도 않고 다소 folk적이어서 귀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흐르듯 지나간다. 그러다 문득 귀 기울여 보면 읊조리듯 나직이 뱉어내는 보컬의 존재감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그런 음악이다.(글 쓸 때 듣는 비슷한 느낌의 음악으로 앵거스 앤 줄리아 스톤 Angus & Julia Stone 이 있다.)
그렇게 우리들의,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던 벨 앤 세바스찬인데, 최근 밴드의 보컬이자 리더인 스튜어트 머독(Stuart Murdoch)이 난데없이 영화를 만들었다. 제목은 갓 헬프 더 걸(God help the girl). 번역하면 우스꽝스러워져 그냥 원문으로 이해해 보자. 뭐 그렇다고 해도 뭔 소린가 싶은 건 마찬가지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제목이 이해가 가기도 하는데 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주인공들이 결성하는 밴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던 한 소녀가 밴드를 결성하면서 겪는 성장에 대한 이야기. 정도가 될 듯. 영화든 소설이든 단순히 줄거리로 말해지고 나면 별 거 아닌 것 같아 허무할 때가 많은데 특히나 이 영화는 더욱 그렇다. 한 소녀가 성장한다는 것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겠는가. 그렇게 몇 마디 말로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다. 특히나 소년도 아니고 소녀라면 더더욱.
소녀의 성장기에 대한 영화는 꽤 많다. 대표적으로는 이와이 슌지의 [하나와 앨리스]가 있을 테고, 최근 [인사이드 아웃] 같은 애니메이션도 있고, 국내에는 배두나가 등장하는 [고양이를 부탁해]도 생각난다. 나는 남자라서 성장기 소녀들의 복잡한 심리나 섬세한 감성을 모두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수 많은 소녀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지켜보고 싸워봤던 지라 이제는 철부지 어렸을 적보다는 어렴풋이 그 마음을 짐작해 볼 수는 있을 정도는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나이가 먹고 경험이 쌓여도 역시 여자는 이해하기 힘든 존재다. 특히나 소녀라면 더더욱.
어떤 말이나 줄거리, 표정이나 사건, 은유나 화면으로도 표현하기 힘든 소녀의 복잡하고 섬세한 마음을 전달하는데 이 영화가 선택한 언어는 음악이다. 그것도 동화 같은 음악을 하던 벨 앤 세바스찬의 리더가 만든 음악. 그리고 감독까지.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영화의 전개에 OST가 삽입되었다기보다는 음악을 이어서 보여주기 위해 영화적 전개를 차용했다는 느낌이다.
영화는 뮤지컬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노래가 등장하는 장면은 한 편의 뮤직 비디오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노래하는 장면만 잘라서 봐도 그냥 이 노래의 뮤직 비디오려니 하기에 충분하다. 굳이 앞 뒤를 보지 못해도 말이다. 몇 편의 뮤직 비디오가 있고, 거기에서 세 명의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하고 춤을 춘다. 그리고 그 뮤직 비디오들을 연결하여 줄거리를 맞추면 영화가 완성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이 영화는 소녀의 섬세한 감성과 젊음의 빛나는 영감을 볼 수 있다는, 성장 드라마 특유의 보는 재미뿐 아니라, 특히나 음악을 즐기는 즐거움이 있다. 등장하는 음악들은 처음 듣는데도 하나같이 너무 매력적이다.
음악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등장하는 소녀까지 너무 매력적으로 보인다고나 할까.
생각해 보니 영화를 만든 사람이 벨 앤 세바스찬의 리더 아니던가. 벨 앤 세바스찬의 소녀 버전 앨범을 듣는다고 생각하면 딱 적당한 표현일 듯.
가장 인상 깊었던 뮤직 비디오는 역시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이브와 제임스의 첫 만남에서의 노래다. 정말이지 풋풋하고 러블리한 느낌이 흘러서 넘치는 장면이지만, 노래의 가사는 꽤 슬프다. 소녀의 자기 고백적인 내용으로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를 만나 수줍게 자신의 비밀을 터 놓는 내용이다.
자신의 슬픈 과거, 슬픈 자의식을 이렇게 풋풋하게 나눌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소녀와 소년은.
그리고, 세 명의 멤버가 같이 공연하는 마지막 장면의 노래. 여기서는 또 다른 소녀 '캐시'의 사랑스러움이 빛난다. 소년과 소녀의 헤어짐, 소녀와 소년이 가장 빛나던 순간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현실보다는 꿈을 쫓는 소녀와 그런 그녀를 쫓는 소년의 풋풋함을 너무 멋들어지게 잘 보여주고 있다. 소년, 소녀가 이렇게 소년과 소녀답게, 이렇게 예쁘고 멋지게, 아름답게 보여진 장면이 또 있었을까 싶다.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 이브가 되뇌이던 대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소녀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소녀뿐 아니라 소년도,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소년소녀인 우리들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I want to be better
I want to be well
벨 앤 세바스찬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직도 마음속에 소녀의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여자라면, 그냥 음악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스코틀랜드에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