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간우산 Nov 29. 2015

어떻게 나는 계속 나일 수 있을까?

디자이너 백종열 감독의 처녀작, [뷰티 인사이드]

올해 청룡 영화제는 작품상을 [암살]에게 안겨주었지만, 나로서는 올해 작품상을 이 영화에게 주고 싶다. 그래 봐야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그래도 작품성이 있는 영화라면 보는 이로 하여금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긴 여운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소모되고 휘발되는 영화가 아닌. 마치 혀를 감싸고 목구멍으로 한달음에 넘어가는 달디단 음식보다는 곱씹어 먹어야만 소화가 될 수 있는 건강식이랄까. 여러 번 곱씹어 먹지 않으면 탈이 날 수도 있는, 그런 영화.


멋진 영화들이지만 작품상, 감독상으로서는 사실 조금 아쉽다.


내게 뷰티 인사이드는 그랬다. 눈물을 쏙 빼는 애틋한 로맨스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이라는 동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인생을 산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무엇보다, 정체성과 관계에 대한 생각.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나 답게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어떻게 나는 계속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이런 어려운 질문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중에 [정체성]이란 작품이 있다. 오래된 부부의 이야기인데, 남자들이 더 이상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해 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다른 사람인 척,  연애편지를 쓴다는 스토리의 소설이다. 그런 특이한 상황 설정을 통해 쿤데라는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한 인간의 모습을 관찰하고 묘사하며 정체성의 본질에 대해 파고든다. 그러니까 아내가 사랑하는 연애편지의 그 남자는 자신이지만,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자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아내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 아내 또한 마찬가지다. 남편에게는 익숙한 친구 같은 존재지만 편지의 그 남자에게는 사랑스러운 여자가 된다. 그렇다면 아내는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


정체성이란 참 어려운 주제다. 그것은 나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나의 본질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본질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정체성을 말할 때 꼭 같이 따라오는 개념이 관계다.


관계에 따라 정체성은 달라지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나만의 정체성이 있기에 나와 너라는 고유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 어려운 공식, 아이러니와 논리적 모순은 인류의 오랜 숙제와도 같은 것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답은 관계에 있다. 결국 나를 만드는 것은 너이고, 너를 만드는 것은 나이며, 오고 가는 교감을 통해 너와 나의 고유성이 완성되어 간다. 동양의 옛 철학자 장자(莊子)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된다.' (관련글: 봄의 철학자. 장자)


이 영화의 주인공 김우진은 매일 얼굴이 바뀌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을 사귈 수 없고, 그래서 겨울 같은 은둔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 영화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왜 이 사람이 그렇게 되는지 따위의 스토리적 설명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사람이 매일 얼굴이 바뀌는 원인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초점은 그런 게 아닌데. 말하고 싶은 바가 있고, 그 말하고 싶은 바를 잘 드러내는데 적합한 상황 설정, 영화적 소재일 뿐이다.


이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 '김우진'이다.


영화의 스토리란 뻔하다.  힘들어하는 연인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뻔한 스토리로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그들의 헤어짐과 만남 때문만은 아니다. 너와 내가, 서로를 통해 아파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마음을 충실히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란, 나라는 사람이란,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마음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 의미가 있음을 느끼게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얼굴이 변하는, 그래서 정체성을 매일 잃어가는 김우진은 마음이 깊은 여자 홍이수를 만나 겨울에서 봄이 되어 간다.


그 아름다운 모습, 그 아름다운 마음, 그 아름다운 관계를 이토록이나 아름답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결국, 김우진을 김우진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건 김우진 스스로가 아니다. 매일 얼굴이 바뀌는, 그래서 '나'라는 사람의 고유성을 나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를 그 답게 느끼고 그래고 그를 비로소 웃게 만드는 건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를 있는 그대로,  심지어 매일 얼굴이 변한다는 사실마저도 그의 일부로 받아들여 주는 그들로 인해 그는 비로소 그가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린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혼자이기만 한 것인지. 나를 나로서 만들어 주는 게 온전히 나로부터 비롯되는 일인지.


어쩌면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엄마, 나의 친구, 그리고 나의 연인. 그들 또한 내 인생의 주인공이지 않을까?


마치 이 영화의 주인공이 김우진을 연기한 수 많은 배우들이 아닌, 항상 그의 곁에 머물렀던 연인 홍이수, 한효주인 것처럼.


이 영화의 주인공 '김우진'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건 또 다른 주인공 '홍이수'이다.


이 영화가 이토록 아름다운 이유는 비단 그들의 이야기와 마음에만 있지 않다. 디자이너이자 CF 감독 출신답게, 백종열 감독이 만들어 낸 화면은 정말이지 한 장면 한 장면 너무 아름답다. 마치 동화 속 어느 곳처럼, 장소도 풍경도 소품도 모두. 특히 주인공이 모두 가구에 빠져있는 섬세한 사람들이라는 점 때문에 아름다운 가구들이 많이 등장하고 가구에 대해 나누는 대화 또한 많이 등장한다.


아름다운 가구, 인테리어 소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감독이 가구 인테리어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도 하지만, 영화에서는 가구가 단지 소품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모든 가구는 표준화되어 판매되지만, 주인공이 파는 가구의 컨셉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맞춤 가구다. 가구, 의자란 생활 속에서 항상 곁에 있고 내가 오랫동안 앉아 있어야 하는 받침대의 역할을 한다.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건이 나에게 꼭 맞지 않는다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한편으론 나에게 꼭 맞춰진 의자가 있다면, 그 의자에 앉아 일하고 생활하는 일이 얼마나 편하고 자연스럽겠는가. 연인도 마치 그런 의자와 같은 게 아닐까. 나에게 꼭 필요하면서도 나에게 꼭 맞아야 하는. 대량 생산된 공산품으로 만든 의자라면 우리가 어떤 애착을 갖고 편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린 그저  겉모양이 예쁜 대량 생산의 공산품 이것저것에 앉아 생활하듯 연인을 찾고 사귀고 헤어지는 건 아닐까.




신인감독의 처녀작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완성도가 뛰어난 영화다. 결말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재미있고 충분히 감동적이면서도 충분히 건강한 영화다. 하지만 소화를 위해 꼭꼭 곱씹어 봐야 하는.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펑펑 울어볼 수 있게 만든, 영화의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일어날 수 없는 긴- 여운을 안겨준, 그래서 보고 난 뒤 기분이 참 좋아졌던 영화다.


아, 개인적인 감상 포인트를 하나 더 들자면, 로맨스 영화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신을 발견했다. 얼마 전 [쎄시봉]에서도 눈물을 쏟게 만들더니, 이 영화에서는 그야말로 빛을 발한다. 오랜만에 열광하게 될 만한 여배우를 만났다. 왠지 모를 아련하고 애틋한 슬픔을 갖고 있으면서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성미를 발산한다. 이 여자, 매력 있다.


여배우, 한효주


그리고 정말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와이 슌지의 영화 [4월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과 그 강렬함을 견줄 만하다. [4월 이야기]의 마지막이 만남의 아름다움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장면이라면, 이 영화에서 둘이 헤어지는 컷은 헤어짐의 아름다움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뻐근해져 오는...


그러고 보니 이 감독, 왠지 이와이 슌지와 느낌이 비슷하다. 또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 주었으면. 고대해 본다.


이와이 슌지, [4월 이야기]의 마지막 만남의 장면 & 백종열 감독, [뷰티 인사이드]의 헤어짐의 장면






매거진의 이전글 I want to be wel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