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세 나오미 제작 & 장건재 감독의 영화, [한 여름의 판타지아]
우리는 10%만 들은 거니까, 나머지 90%의 이야기가 있겠지
영화에 나오는 대사다.(내 기억으로는) 이 대사는 영화의 출발이자 구성이고 주제이자 내용인, 이 영화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싶다. 혹은 이 영화에 대해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멀리서부터 가까이 들어가는 과정"과 같은 영화랄까.
영화는 형식 자체가 재미있는데, 영화를 준비하면서 현장 답사를 하는, 언뜻 보면 다큐멘터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전반부는 사실은 픽션이다. 흑백이라 더욱 다큐의 느낌을 풍기는데 이 부분에서 등장하는 감독은 이 영화의 실제 감독이 아닌 감독 역할을 하는 배우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당연히 그가 감독인 줄 알았다.) 영화를 준비하는 모습 또한 이야기의 일부였던 셈. 그렇다면 왜 그런 장면을 일부러 넣었을까? 재미있지도 않고 지루하기만 한데.
현장 답사에 대한 생각을 밝히는 감독의 말에서 그 열쇠를 찾을 수 있다. (영화 속 감독의 말, 영화 밖 감독의 말 모두) 그러니까, 영화는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고, 사람의 이야기란 저마다의 사건과 맥락, 느낌과 감성 자체가 다 다른 아주 구체적인 것이다. 그 각각의 다른 이야기를 일컬어 우리는 '사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영화란 그런 구체적인 장소, 구체적인 시간, 구체적인 인물의 구체적인 이야기, 즉 사연을 담는 매체인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일본의 지방 중에서도 지방인 이름도 생소한 '고조시'라는 곳을 설정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지 않았나 싶다. '도쿄'나 '교토', '오키나와'를 떠올리면 뭔가 전형적인 이미지와 느낌이 있어서 그런 전형성이란 구체적인 이야기 전개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아무것도 사전 정보와 이미지가 없는 생소한 대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부각하기에 유리하다. 그래서 만들어진 구체적인 이야기, 즉 구체적인 시간, 장소, 인물들끼리 만나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 그로 인해 파생되는 매우 구체적인 감성과 생각들. 이런 것들이 모두 영화의 묘미가 아닐까.
그래서 전반부의 다큐멘터리 형식은 이야기를 구성하게 되는 구체적인 소재들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아직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의 소재들을 주워 담는 과정이기 때문에 흑백이다. 그곳에서 안내를 맡은 시청의 한 직원이 자신의 이야기를 살짝 들려준다.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그리고 또 다른 사람, 청년 시절 이 곳에 방문했던 한국인 여자를 잊지 못한다는. 이렇게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건, 아직 이야기가 소재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걸 말한다.
그리고 (영화 속) 감독은 현장 답사를 마치고 통역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10%만 들은 거니까, 나머지 90%의 이야기가 있겠지."
10%의 소재를 가지고, 나머지 90%에 상상의 나래를 달아준다. 그 90%의 문을 여는 소재는 불꽃놀이다. 불꽃놀이와 함께 영화는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고, 이는 시간, 장소, 인물, 사건의 구체성을 담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모든 소재가 살아나게 되는 순간이다. 전반부와 후반부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반부가 소재에 불과했다면, 후반부에는 그것들에 상상과 구체성이 부여됨으로써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된다. 심지어 전반부와 후반부가 같은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지는 것 또한 그런 이치가 아닐까.
소재에 상상을 덧 붙여 만든 구체적인 시간, 장소, 인물, 사건의 연속 - 이야기. 그래서 영화 제목도 '한 여름의 판타지아'가 아닐까. 한 여름에 일본의 작은 도시 고조에서 이루어지는 두 남녀의 만남, 그리고 대화, 깊어지는 감정, 헤어짐의 아쉬움.... 불꽃놀이.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 어떤 영화든 판타지아인 것이다.
메이킹 필름에서 이 영화의 실제 감독, 장건재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이 영화는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영화가 소재에서 이야기가 되는 과정, 즉 결과로써의 영화만이 아닌, 영화가 이야기로서의 생명을 부여받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단순한 장소에서 출발했지만, 이야기는 구체성을 부여받으며 애틋하고 설레는 감정으로 다가온다. 그냥 통역사에서 한국에 큰 고민거리를 두고 온 한 여자로, 지방 도시의 공무원에서 한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 겉에서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은 길, 우물, 초등학교와 같은 장소도 이야기 속에서는 등장인물 간 관계의 감성이 실리고 대화의 느낌이 부여되면서 하나의 추억이 담긴 이야기가 된다.
일본의 거장, 가와세 나오미가 제작을 맡았다고 해서 선뜻 보게 되기도 한 영화였는데, 가볍게 보기에는 또 한편으론 무거운 영화. 여운이 길게, 그리고 여러 면에서 남는 영화다. 두 남녀가 만난 아름다움의 여운과 이야기가 된 영화의 아름다움, 그리고 영화의 장소에서 이야기로 변한 고조시라는 특별한 곳의 아름다움까지.
평범한 듯 하지만 그래서 여운은 길-었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