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간우산 Nov 07. 2015

봄의 철학자, 장자

강신주의 莊子 복원하기 프로젝트, [道에 딴지걸기]

노자는 저 유명한 시구 '도가도비항도(道可道非恒道), 명가명비항명(名可名非恒名)'으로 이후 많은 철학자들에게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함과 동시에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오묘하고 신비한 철학자로 회자된다.


중국 춘추시대의 철학자, 노자(老子)


시구의 뜻은 "도(진리)가 도라 말해진다면 그것은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며, 이름(언어)은 이름으로 말해진다면 항상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텐데 번역을 해도 아리송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서양의 철학이 언어놀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충격과 반성으로부터 헤메일 때 재발견되어(다소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무너져 가는 서양 철학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보자면 이렇다. 진리를 어떤 불변의 원리 - 진리로서 개념화하는 순간 그 불변의 원리 - 진리는 더 이상 항상 그러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라 할 수 없다는 것이며(도가도비항도), 이는 진리가 언어라는 TEXT의 닫힌 구조 안에서만 진리일 뿐이라는, 실제 세계를 완벽하게 지칭하지 못한다는 현대 구조주의 철학의 생각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명가명비항명) 즉 진리 - 도의 개념이란 언어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언어란 자의적이고 가변적이어서 언어 밖 외부 세계를 지칭할 수 없으며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구조주의 철학의 시발점이 되었던 언어학자 소쉬르의 주장을 또한 정확하게 반영한다. 그러니까,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서양 철학이 2,500여 년의 세월을 거쳐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문제를 노자는 2,500여 년 전에 이미 말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성, 논리, 언어로 출발하여 그것에 기대고 있는 서양철학의 형이상학과 달리, 이성, 논리, 언어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며 오히려 정의하지 않음으로 이해하고, 언어로 명명하지 않으며, 오로지 직관, 통찰, 은유로서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였던 동양의 철인(哲人)들은 이제는 우리가 한 번쯤은 돌아보고 읽어보아야 할, 오히려 지금 시대에 더 큰 가르침을 주는 성인이자 멘토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탁상공론에 몰두했던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만 칭송하지 말고 말이다.(물론 그들의 위대한 업적을 무시할 일은 아니다.) 어떻게 내가 생각함으로써 존재한다는 말인가. 생각하는 나의 존재만이 내가 알 수 있는 확실한 진리라는 건, 노자의 말처럼 '항상 그러한 진리'에 대한 과도한 강박과 집착, 논리에 대한 맹신과 절대화에서 비롯된 비상식적인 진리이자 진리라고 하기엔 너무도 초라하고 무기력한, 그저 언어적 명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


노자 철학, 동양 철학의 위대함에 대한 칭송은 이쯤에서 하고(너무 오바했다), 책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노자에 대해 공부하기에 적절한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노자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가진 책에 더 가깝다. 아니 노자보다는 노장사상(老裝思想)이라는 딱지로 억울하게 노자랑 엮여버린 장자에 대한 재조명, 장자 복원하기를 위한 책이라는 설명이 더 적절할 것이다.


중국 전국시대 철학자, 장자(莊子)


장황하게 노자를 칭송해 놓고선 다시 노자를 비판하는 책을 설명하기가 여간 민망하지 않지만, 사실 철학과 사상이라는 게 정답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애초에 철학이란 게 기존 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니(플라톤 없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상할 수 없다) 주장과 비판을 번갈아가며 읽는 것이 어찌 보면 한 철학자의 말을 이해하는데 가장 빠른 방법일 수도 있겠다. 왠지 변명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쯤에서 변명은 접고...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 : 가운데 하늘을 가리키는 자가 플라톤, 땅을 가리키는 자가 아리스토텔레스다.


참고로 노자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도올 김용옥의 EBS 노자 강의를 적극 추천한다. 아마도 노자에 있어서는(동양 철학 전반에서 그러하겠지만) 국내 최고의 권위자가 아닐까 싶다. 다만 너무 아는 것이 많아 내용이 다소 어렵고 강의가 너무 열정적이다 보니;;;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깊이보다는 쉽고 재미있는 강의를 원한다면 역시 EBS의 인문학 강의, 최진석의 [현대철학자 노자]를 들어보길 권한다.


국내 노자철학의 권위자, 김용옥(왼쪽)과 최진석(오른쪽)


이 책은 강신주가 늘 그러하듯, 그가 세상을 보는 관점인 시스템과 계급의 문제, 그리고 주체적 삶의 문제에서 두 거장의 철학을 살핀다. 간단히 말하자면, 노자는 지배계급 편에서 어떻게 하면 국가의 통치와 운영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필요에서 출발한 철학이고, 장자는 이와는 전혀 반대로 피지배계급 편에서 그들의 주체적 삶을 위해서는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한 철학이라는 점에서, 두 철학자는 완전히 다른, 어찌 보면 반대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다만, 억울하게도 중국 역사의 바이블로 통하는 역사서 [사기(史記)]를 집필한 사마천의 몰이해 때문에 그 두 명의 철학자가 '노장사상'이라는 이름으로 묶여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사기를 읽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 노자와 장자는 유사한 주장을 하는 비슷한 철학으로 쉽게 이해돼 버렸으며, 이 때문에 노자보다는 장자가 더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중국 전한시대 역사가, 사마천


즉 노장사상이라 하면 대부분 노자의 철학으로 이해하고, 장자는 노자의 철학을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풀어낸 이야기꾼 같은 오해를 받는데, 장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고도 억울한 일인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하고자 하는 주장이 노자와는 매우 거리가 있고 심지어는 노자는 자신의 주장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 생각되는데 이렇게 같이 묶여버리다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장자의 그런 마음을 이해했는지 강신주는 장자 복원하기에 나섰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책 한 권으로 얼마나 복원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강신주, [道에 딴지걸기] : 노자 & 장자가 아닌 장자 & 노자로 표기하고 있다.


장자를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그의 눈물겨운 노력의 일부분을 소개해 본다. 역시 장자의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일화인 '호접몽(胡蝶夢)'이 적합한 예가 될 수 있으리라. '나비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전문은 이렇다.


옛날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훨훨 나는 나비였다. 유쾌하게 느껴졌지만 자신이 장주라는 것을 알지는 못하였다. 갑자기 깨어나서 보니 확실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니, 이것을 '물화(物化)'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흔히들 말하는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운운하며 뭔가 동양의 신비로운 인식론 인냥, 혹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지칭하는 상대주의나 회의주의 인냥 말들을 하지만 사실은 이 나비 이야기를 통해 장자가 하려는 말은 그런 신비로움이나 상대주의 따위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양에서 불변적 개념으로 말하는 '정체성'에 대한 유연한 해석이자, 역시 서양에서는 부정적으로 말하는 '타자성'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담는 말이다. 강신주의 말을 들어보자.


장자는 나비가 되어야 할 때 분명 나비가 되고 장주가 되어야 할 때 분명 장주가 될 수 있는 '생성의 긍정'에 대해 말했다. 여기서 생성의 긍정은 타자와 만남을 긍정하고 나아가 타자와 소통하여 주체 자신의 변형을 긍정하는 것이다. 오직 타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어느 때는 정말 장주일 수밖에 없고, 어느 때는 정말 나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장주와 나비의 분명한 구분에는 타자와 우연히 만나는 일이 분명하게 인식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체성이란 '영원 불변한 나의 본질'과 같은 언어적 개념, 고정적 의미에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타자의 고유성, 타자와의 관계성에 맞게 자신을 변형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생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하며, 나와 타자의 구분의 없음과 나와 타자의 구분이 있음 모두를 통해 나는 만들어진다. 이를 장자는 물화(物化)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타자와 구분되지 않는, 구분되는 관계를 통해 나의 정체성이 생성되는 과정을 그는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다.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된다.
(與物爲春)


실로 멋지지 않은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나의 정체성이 생성된다.'라는 의미를 저렇게 멋지게 표현하다니. 이것이 동양철학의 묘미이자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묘미가 아닌가 싶다.


말하다 보니, 엉뚱한 걸 횡설수설한 셈이 되어 정작 위에서 언급한 노자와 장자의 다름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책을 읽어보게끔 하는 낚시의 의미로 남겨두도록 하고, 장황했던 글을 황급히 마무리해 보자.




어쨌든 이 책은 노자의 똘마니쯤으로 알려져 있는 장자를, 재미있고 신비로운 이야기나 풀어내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이미지에서 구출하여, 生을 긍정하는 철학자로 주체적 삶의 아름다움을 밝혀낸 철학자로 다시금 사람들에게 밝혀주었다는 데서 큰 의미를 가진다. 부디 널리 널리 읽히고 알려져 그의 억울한 누명, 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벗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니체가 말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