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음악평론가 강헌의 첫 평론집, [전복과 반전의 순간]
고려시대 혹암 스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어느 날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달마는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
우리에게도 익숙한 달마 스님을 그린 '달마도'를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수염을 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때문에 제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염이 없는 이유가 문제가 아니고, 애초에 수염이 없다는 전제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정면으로 배치되기에 제자들은 이렇게 되묻는다.
"스님도 달마를 직접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달마에게 수염이 없다고 확신하시나요?"
혹암 스님은 웃으며 대답한다.
"그런데 너는 지금까지 어떻게 달마에게 수염이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냐?"
- 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중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 확인되지 않은 지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인간은 신(神)이 아니므로 모든 걸 직접 보고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사실이 왜곡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겪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사실과는 너무 다르게, 너무 멀리 나가 완전히 다른 사실로 대체되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이 같은 현상, 즉 어떤 사실이 사회적으로 공인된 하나의 자연스러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그것이 실제와 얼마나 가까운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가와 상관없이)를 두고‘신화’라고 정의한 바 있다.
사실의 신화화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신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 원리는 단순히 특정 텍스트 또는 이미지의 확산과 반복이라는 점이다. 가령 이 책에서 말하듯, 모차르트가 궁정 음악가 살리에르의 질투를 한 몸에 받을 만큼 천재였다는 '상식'은 단지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의 파급력 때문이었다는 '사실'처럼.
상식이 된 신화의 문제점은 거짓 정보의 유포와 같은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가 아닌, 어떤 대상의 진정한 가치와 정당한 평가를 심각하게 왜곡시킨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마치 '모차르트의 음악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천재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늘이 내려 준 천부적인 재능으로 탄생한 위대한 예술이라는 주제는 확실히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하여 일반인에게 흥미거리가 될 수는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싶어 하고, 반대로 사실인 것처럼 전달되어야 더욱 흥미를 유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실이란 그렇게 단순하게 발생되지 않는다. 모차르트 음악의 가치는 단순히 천재라는 낭만적인 단어로 설명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특정 시대,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그 사건은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럴 수 있을 때 그의 음악이 위대한 진정한 이유 또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이해했을 때, 그의 천재성이 왜 그렇게 빛나는지 그 정수와 비로소 마주대 할 수 있다. 그 천재성이 어느 날 하늘이 뚝딱 내려준 것이 아닌, 얼마나 길고 큰 고뇌와 시련의 시간들을 거쳐 비로소 발휘되게 된 것인지 그 진짜 속내를 알 수 있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하나 하나 풀어내고 드디어 날개를 펼친 나비의 탄생을 목격하는 것과도 같은 발견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본 것은 그저 액자 속에 박제되어 있는 영혼 없는 인형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인 것이다.
아마도 진정한 사실은 지식이 아닌 역사의 고증 속에서만 밝혀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대한 신화를 벗기고 그가 발견한 음악가들의 진짜 모습, 그들의 음악이 위대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의 찬미]라는 영화로 유명한, 유부남과의 동반자살로 유명한 성악가 윤심덕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그야말로 그 당시로서는(일제시대) 상상하기 힘든 로맨틱한 일대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작가는 그 사건의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인 맥락과 인물의 성격, 관계에 대한 고증을 통해 집요하게 그 실체를 파헤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자세한 얘기는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길. 정말로 흥미진진함)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백미는 첫 장에 등장하는 재즈와 로큰롤에 대한 고찰이다. 재즈, 로큰롤의 기원과 확산에 대한 많은 책과 다큐멘터리를 접해 보았지만, 이 책만큼 광범위하고 다각적인, 그리고 깊이 있는 시선을 가진 음악사 평론은 처음이다. 그야말로 현대 대중음악의 뿌리와 정수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단순한 역사적 사실 고증에서부터 음악에 담긴 정신과 영혼까지 모두 싹싹 긁어 내는 느낌이다. 마치 그때의 현장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것처럼. 나도 대중음악을 참으로 좋아라 하지만 새롭고 놀라운 이야기들로 가득했고,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는지 얼마나 무심했는지 절감하게 된 시간이었다. 뭐랄까 이런 느낌이랄까?
그동안 나는 음악을 소문으로만 듣고 있을 뿐이었어.
나는 음악에 대해 항상 이렇게 말해왔다. 그것은 영혼의 소리라고. 그래서 영혼이 담기지 않은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고. 하지만, 정작 현대 대중음악이 어떠한 영혼들이 어떠한 억압 아래, 어떤 정신과 정서를 가지고 시작했던 울림인지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가 왜 책 제목을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고 지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음악이란 그저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모여서 노는 유흥을 위해,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시작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억압받는 민중들이, 억압 아래 있던 한 영혼이 그 모든 억압으로부터 살기 위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절박하게 부여잡은 존재 방식이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음악이란 이렇게 시작된 소리다.
나 여기 살아있소
그 소리가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울려 더 큰 울림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울려 퍼져 만들어진 거대한 물결이 바로 대중음악이었음을. 그의 숭고한 글, 한 글자 한 글자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꼭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아울러 이 책은 동일한 제목의 강연(‘벙커’라는 문화 공간에서 개최된)을 계기로 쓰여지게 되었으며, 책의 대부분이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문체 또한 바로 앞에서 강연을 듣는 듯한 생생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술술술 읽히지만 내용 만큼은 단순하지만은 않은, 그야말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고 나면 엄청나게 뇌가 배불러진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과 함께, 집요한 고증, 광범위한 시야, 날선 통찰력을 모두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평론가란 어때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책을 쓰기 위해 강헌은 그토록 책 한 권 내지 않고 그 동안 아껴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마치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평론을 하려면 말야 이 정도는 해야지.
한 사람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 얻은 거인의 시야를 단 며칠 만에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독자로서 정말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책을 내 주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2권을 이어서 낸다고 하니 그 책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의 평론의 가장 큰 힘은 아마도 음악을 듣는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만든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이 하늘이 내린 천재라 할 지라도 창작이란 한 사람의 영혼이 고뇌와 좌절을 딛고 자신만의 것을 토해내는 숭고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직장에서 기획서 단 몇 장을 쓰는데도 이렇게나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하물며 음악이나 예술은 오죽하랴. 그렇게 만들어진 고귀한 결과물을 우리는 매일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하고 소모하고 잊어버리고 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참으로 억울한 일일 것이다.
강헌은 그런 음악의 위대함, 창작의 고귀함을 단 한 톨도 흘리지 않고 책에 고스란히 담아놓고 있다. 정말이지 음악만큼이나 위대하고 고귀한 평론이 아닐까 싶다. 책상에 앉아 있지만 마음으로 일어서 조용히 기립박수를 그에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