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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Dec 08. 2015

니체가 말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시라토리 하루히코가 엮은 니체 격언 모음, [니체의 말]

니체는 현대철학의 서막을 연 철학자로 얘기되곤 하지만, 그의 글들을 읽어보면 철학자라기 보다는 현자(賢者)에 가깝다. 진리에 대해 논하기 보다는, 진리에 다가서는 사람, 진리에 다가서는 인생에 대해 논했다고나 할까. 어찌 보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가장 현명한 대답을  내놓기 위해 고심한 철학자가 아닐까 싶다.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도 대답하기 힘든 질문에 대해 그가 내놓은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한데,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삶을 움직이며 즐기는 인생이랄까.(내 마음대로 해석해 본다면) 혹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가짜의 삶으로부터 진짜의 삶을 찾는 여정이랄까.


그렇다면, 진짜의 삶이란 무엇일까? 누구나 다 태어나 살아가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죽기 마련인 것이 인생인데, 그렇다면 진짜가 아닌 가짜의 삶도 있다는 말인가. 니체의 말을 들어 보자.


허물을 벗지 않는 뱀은 결국 죽고 만다. 인간도 완전히 이와 같다. 낡은 사고의 허물 속에 언제까지고 갇혀 있으면, 성장은 고사하고 안쪽부터 썩기 시작해 끝내 죽고 만다. 늘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사고의 신진대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을 쉽게, 그리고 안락하게 보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무리 짓지 않고서는 한시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된다. 언제나 군중과 함께 있으면서 끝내 자신이라는 존재를 잊고 살아가면 된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는 것이 성가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고 상자에 든 화석을 산다. 이 화석은 곧 타인의 낡은 의견이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주고 산 의견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는다.


가짜의 삶이란, 진정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삶이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무언가 살 수 있는 능력, 즉 구매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무엇이든 쉽게 돈을 지불하고 얻을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사람은, '자신만의 의견'이는 별로 티 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굳이 성가시게  이런저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주로 '소비'를 선택한다. 멋진 옷과 비싼 브랜드, 호의적인 매너와 여유 있는 웃음, 단편적이지만 교양적으로 보이는 지식... 모두 소비를 통해 효율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샤넬을 산다고 샤넬의 디자인이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벤츠를 탄다고 벤츠의 기술력이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모습을 구성하는 것은 그런 겉치레가 아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법적 소유의 내 것일 수는 있어도 내가 만든 것은 아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므로 내 몸에 칠 수는 있어 나로부터 비롯된, 나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 그러므로 내가 입고 있는 옷은 결국 내 것이 아니다. 법적 소유는 내 것일 지라도, 그 옷에 담긴 창의적 정신은 디자이너의 것이다. 옷의 정체성이 디자인으로 결정된다고 한다면, 그 옷의 진짜 소유는 결국 디자이너의 것이다.


마치 어떤 노래를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부른다고 해도, 그 노래의 진짜 주인은 내가 아닌 그 노래에 창의성을 불어넣은 작곡가와 가수인 것처럼.


자신만의 것을 했을 때, 진짜가 된다


결국 진짜의 삶이란,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어 낸 결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길이다. 타인이 만든 것을 내 것인 양 걸치고 우쭐대는 모양, 타인의 의견을 내 의견인 양 떠들어 대는 말솜씨, 타인의 모습을 흉내 내며 살아가는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타인이 알려준 길을 내 길인 것처럼 걷는 것은 나의 삶, 진짜의 삶이 아니다. 진짜의 삶이란, 내가 만든 길, 그래서 길의 모양새가 곧 나인, 세상의 유일한 나의 길을 걷는 여정이다.


이미 닦여져 있는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 내가 만든 길이 나의 길이 된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진짜의 삶을 들어보자.


문제는 자신의 '왜?'에 대하여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자신이 왜 그것을 하고 싶은지, 왜 그것을 원하는지, 왜 그렇게 되고 싶은지, 왜 그 길을 가고자 하는지... 그 같은 물음에 깊이 사고하지 않고 명백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왜?'라는 의문에 명백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후의 모든 것은 매우 간단해진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곧 알 수 있다. 일부러 타인을 흉내 내면서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미 자신의 길이 눈앞에 명료히 보이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일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 길은 온전히 나로부터 비롯된 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전한 내 길이 하나의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  그동안의 경험들, 온갖 책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만, 단지 그것 자체는 아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 옳은 이론이라도 하여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순간, 내 길은 사라진다. 그것은 더 이상 내 길이 아닌 그 이론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니체가 말하는 진리란 '나만의 길'이다. 즉 항상 옳은 법칙 같은 것이 아닌, 진정한 나를 만나게 해 주는 삶의 순간순간 같은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순간을 니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니체는 철학을 가지지 말라고 말한다. 철학을 가지지 말라는 철학자라니.


일반적으로 '철학을 가진다'라고 말할 경우, 어느 정도 굳어진 태도와 의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획일화하도록 만든다. 그런 철학을 갖기보다는 때때마다 인생이 들려주는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이 낫다. 그 편이 일이나 생활의 본질을 명료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철학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나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진정한 내 모습을 얼마나 직시하고 있는가. 그렇게 보였으면 하는 모습을 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다른 이의 시선에 나를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지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내 본연의 모습인가? 혹시 다른 무언가, 누군가를 흉내 내고 있지는 않은가?


세계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했던 다큐멘터리 [시대 정신]에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지금까지 줄곧 배웠던 것들은 그저 놀이에 불과합니다. ... (인생이라는) 게임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게임은 이미 되어있는 나를 찾는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시대 정신 Zeitgeist]




나는 나만의 길을 가고 있는가? 나는 나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내 삶은 진짜인가?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나 자신에 대한 앎으로부터 출발한다. 나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 길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니체와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말도 나만의 길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주제 파악하라는 훈계 정도로 알고 있었던 말인데, 깨달은 자의 말이란 그냥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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