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실현 가능한 디스토피아

연상호, 『정이』

by 빨간우산

SF판 연상호 월드. 연상호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비즈니스'다. 성도, 종교도, 폭력도, 인간도...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약자는 최소한의 인간성도 보장받을 수 없이 이용되고 폐기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돈과 권력 앞에 약자일 뿐이며 시스템의 부품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법한 이 사실을 연상호는 그 누구보다도 섬찟하고 실랄하게 우리 앞에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으로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연상호의 세계관을 드러내는데 디스토피아 미래만큼 적절한 설정이 또 있을까.


SF에서도 여전히 끔찍한 연상호 월드

단지 세계관뿐 아니라 그것의 물리적 실체는 훨씬 더 실감난다. 고퀄의 CG효과뿐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끊임없이 질주하는 속도감, 인간의 속내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장면들, 특유의 염세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출구없는 디스토피아의 구현, 이 모든 스릴과 서사의 요소들을 묶어내는 적절한 밸런스.. SF에서도 역시 질 높은 장르물의 퀄리티를 보여주는 연상호의 새로운 도전작이다.


기술적인 면에서, 서사적인 면에서 모두 높은 장르물의 퀄리티를 보여주는 야심작

연상호 월드로서 이 작품이 가진 염세적 세계관은 근미래 과학기술과 만나 더욱 실감나게 증폭된다. AI로 대표되는 미래 기술이 코 앞에 다가와 있는 지금, 인간과 기계 구분의 모호함, 그에 따른 인간성 붕괴와 기술 윤리의 문제는 어쩌면 환경이나 전쟁보다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난제가 될 수도 있다. 미래 사회에서도 여전히 돈과 권력은 인간 위에 군림할 것이며 생명을 창조하는 신적 능력에 준하는 기술의 힘을 거머쥔 돈과 권력이 인간의 욕망과 만나 또 어떻게 새로운 차원으로 인간성을 파괴해 갈지, 이 영화를 통해 간접체험해 볼 수 있다. 더 이상 미래는 설레는 기대감이 아닌, 두려움과 불안으로 우리를 엄습하는 어둠의 그림자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 차라리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멈추고 퇴보를 선택하고 싶은 심정이 될만큼 이제 진보는 전혀 반갑지 않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진보인가. 금의 과학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곧, 실현 가능한 암울한 미래.

작품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디스토피아의 클리셰들이 넘쳐난다는 점과 그의 작품에서 언제나 언급되는 인물의 역사와 감정선을 다루는데 다소 거칠다는 점에서 영화 종료 후 쉬움이 잔상처럼 남는다.


그래도 괜찮다. 연상호 월드니까. 이 한 마디로 그 정도의 아쉬움은 훌쩍 넘어 빠져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RIP 강수연. 이 험한 세상을 떠나 평안한 곳에서 영면하길.


연상호 감독과 강수연 배우



각본: 연상호

연출: 연상호

출연: 강수연, 김현주, 류경수 외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