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삶을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을 뽑으라면 누구라도 세 손가락 안에는 꼭 들어오지 않을까.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이라면 안 하면 그만이겠지만, 또 세상 살아가는 일이란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회사를 다니기는 싫어도 먹고 살고 뽐내려면 어쩔 수 없이 다닐 수밖에 없듯, 사람이 싫다고 해도 외롭지 않게, 인간답게 살려면 가족과 친구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굳이 많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인간관계야 말로 양보다는 질 아니던가.
꼭 필요하지만 어렵고도 힘든 그것. 내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그것. 때론 그로 인해 상처와 고통도 감내해야 하는 그것.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마음의 안정과 풍요가 비로소 얻어지는 바로 그것. 그렇다. 그것이 인간관계의 딜레마이다. 돈을 버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의 딜레마를 가지긴 하지만. 그러고 보면 인생 자체가 딜레마가 아니던가.
아무튼 신세한탄은 그만하고. 어렵지만 꼭 헤쳐나가야만 하는 일이기에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일, 사람과의 친분을 잘 맺고 유지하고 혹은 끊어내는 일에는 나름의 기준이 필요하다. 거창하게 말하면 인간관계의 철학이 필요하달까.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기에 누구나 나름의 기준과 철학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러다 보니 성인이나 현자부터 주변 사람들까지 인간관계를 위한 조언의 말 또한 많고도 많다. 요즘의 소셜 미디어에도 역시 그런 짤들은 차고 넘친다. 다들 맞는 말 같고 현명한 지혜 같아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삼아 적용하고 실천하기란 역시 쉽지 않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조언들끼리 모순되는 경우도 발생하곤 한다. 그렇기에 자기만의 기준이 필요한 것이다. 개똥철학이라 해도 모두 자기 나름의 삶의 철학이 있듯이 말이다.
성인과 현자들이 얘기한 인간관계에 대한 말씀 중에 주로 거론되는 중요한 가치를 두 가지로 추려본다면, 아마도 '사랑'과 '믿음'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만큼 꼭 실천해야 하지만, 그만큼 실천하기도 어려운 덕목이다. (그러니 성인들이 그렇게 강조했겠지. 심지어 예수님은 그걸 몸소 보여주기 위해 죽음조차 감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얼마 전 그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을 한 문장에 요약한 현자의 말씀을 본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말이다.
모두를 사랑하라. 그러나 아무도 믿지는 말라.
이런 엄청난 말을 한 현자는 바로 인간의 심연과 삶의 모순을 꿰뚫어 보여주었다는 소설가 셰익스피어다. 역시 대작가는 대작가다. (어느 트위터에서 본 글이므로 출처가 확실하지는 않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이라 무엇도 믿을 수는 없겠다만, 설령 누군가 지어낸 말이라 해도 너무나 절묘하지 않은가.)
물론, 이 엄청난 말은 대단해 보이지만 역시나 실천하기는 어렵다. 특히 뒷 문장이 아닌 앞 문장은 더욱더. 모든 현자의 말씀이나 철학이란 대부분 이상주의를 품고 있고 우리는 그 이상을 향해 힘쓰며 노력할 때 비로소 이상의 근처에라도 다다를 수 있거나 비슷하게라도 흉내라도 내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본다면, 이런 말도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이상적인 기준으로 삼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 앞 문장, '모두를 사랑하라'는 그렇게 이상향으로 놓아두자. 인류애의 마음가짐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해보자는 마음가짐 정도로 해 두자. 불가능하더라도 애써보기는 하자. 자, 그리고 중요한 건 그다음. '아무도 믿지는 말라'는 이 말이 문제다. 이건 앞의 말과 다르게 너무 비관적이지 않은가. 세상에 아무도 믿을 수 없다면, 불안해서 어떻게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부모모 형제도, 부부와 연인 간에도 믿음을 거두어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 이 한 문장을 놓고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 볼 수도 있지만, 윤리와 도덕을 논하자는 글이 아니므로 대략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 말의 기능과 효용성을 추려보자. 그러니까 셰익스피어 같은 문학가가 직접적인 의미 그대로 이 말을 했을 리는 없지 않겠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같은 대사 또한 말 그대로의 직접적 의미를 지시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말 그대로만 보자면, 당연히 살아야지 왜 죽느냐는 대답이 나올게 뻔하지 않겠나.) 그러니 문학적으로 해석을 해보자면, 그만큼 믿음이란 것은 함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만큼 인간이란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존재이며 세상은 험하고 불안정한 곳이라는 걸 말하고자 함이겠지. 그러니까 그런 만큼 거꾸로 말하자면 믿음이란 희귀하지만 소중한 가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란 믿고자 하는 선택의 문제이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주변 사람이든, 그 역시 인간이므로 불완전하고 흔들리고 고뇌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면 외에 다른 면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갈 것이냐 아니냐를 신중하게 내가 결정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
하지만 이런 근본적인 문제, 철학적인 고뇌로는 역시 현실적인 도움이 되기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이런 애매한 진실에 근거한 나만의 현실적인 믿음의 기준에 대해 말해보자.
일단 셰익스피어의 말 대로, 어떤 사람이든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의심하지도 않는다. 대개 어떤 사람이든 믿을 만한 구석과 의심할 만한 구석을 모두 갖고 있기 마련이므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적당한 경계와 어느 정도 친밀감을 가지고 대해보자. 이왕이면 친절과 배려의 태도를 가져야겠지만 그렇다고 간쓸개 다 내어줄 것처럼 나를 희생하거나 마음을 내어주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태도는 그만큼 상대에게 바라는 바도 늘어나기 때문에 상대에게도 마찬가지로 난처한 입장을 초래하고 마니 조심해야 한다. 친절과 배려로 대하되, 믿음을 가지지는 않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관계를 가져가면 어느새 그 어렵다던 '적절한 거리'가 맞춰질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 거리의 정도는 조금씩 다르다 하더라도.) 아마도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이런 거리를 유지한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적당히 경계하며 믿지는 않되, 친절과 배려의 태도는 잊지 않는.
하지만 이런 적절한 거리는 편할지는 몰라도 역시나 마음의 온기를 느끼기는 어렵다. 따뜻함과 차가움으로 보자면 어쩔 수 없이 차가움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결국 진실된 관계라고 보긴 어렵다. 인간에겐 마음을 놓는 진실된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경계하는 마음을 풀어놓지 못한다면 자신의 마음조차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삶은 너무 불안하고 공허하다. 그 불안과 공허를 채우려면 인간의 따뜻한 온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기에 주변 사람들 중 마음을 놓고 자신의 마음을 내어줄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 우선 아주 극소수의 사람일 테고(왜냐하면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 극소수 사람을 선택하게 되는 맥락이란, 사람마다 연령대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사랑보다는 믿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어릴 때는 사랑이 될 때가 많지만 나이가 들 수록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곧 믿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일단 믿음을 가지기로 선택했다면 그저 믿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사람을 믿는 기준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이것이야말로 각자의 현명함에 맡길 밖에), 어쨌든 믿기로 했으면 그냥 직진해야 한다. 믿음이란 조건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러저러해서 믿을만해서 믿는다, 이런 믿음은 사실 믿음이라기보다는 거래에 가깝다. 믿음이란 근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믿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까 말했듯 인간은 불완전하고 복잡한 존재이므로 신이 아닌 이상 완전히 다 알기 어렵고(나 자신도 잘 모르는게 나인데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전적으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 의심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고 의심할 만한 근거 또한 계속 발견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믿음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믿기로 결정했다면 그저 믿는 것이 좋다. 믿기로는 했지만 마음속 어느 구석에서는 의심과 경계를 풀지 못하는 태도란 사실 적당한 거리를 두며 지내는 것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상대 그것을 쉽게 알아채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적당히 거리를 두던 상태보다도 훨씬 더 멀어지게 되고 만다. 혹은 끊어지거나. 믿음을 유지하던 사이에는 멀어졌다 적절한 거리를 다시 두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는다. 그건 일종의 '배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배신을 느끼는 관계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결국 파국에 이르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신뢰할 땐 신중해야 한다. 믿음의 관계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결론을 내렸다면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 깨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다루고 가꾸어야 한다. 믿음은 한번 깨지면 적당히 다시 붙여 쓸 수 없다.
이것이 나의 인간관계의 처세이다. 대부분은 거리를 두고 믿지 않되 친절하게 대하고 배려를 베푼다. 그중 아주 일부를 믿음의 관계라는 영역으로 들여놓는다.('내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관계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의 영역에 있던 사람 중, 그 믿음의 견고한 마음이 깨진 경우에는 저 멀리 '믿을 수 없는' 영역에 놓는다. '내 인생에 두지 않는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영역의 사람들은 중간계의 적당한 관계보다도 멀다. 아니 인간관계란 테두리에 아예 포함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믿음 관계를 깰 때에는 신중과 숙고의 긴 과정을 거친다. 세상에는 수많은 오해와 편견, 잘못된 정보와 근거 없는 추측이 난무한다. 내 마음 또한 감정에 휘둘리기 때문에 진실을 보는 투명한 눈을 갖지 못한다. 그렇기에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어떤 그런 '징조'가 보일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징조란 오해나 추측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숙고와 신중의 기간을 충분히 거치긴 하지만 결국은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이미 감정이 상해서 그 런 결론으로 스스로를 몰고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기준으로 보았을 때, 대략 그 분포가 정량적으로 나눠진다. 그러니까 80%의 중간계 사람들, 그리고 5%의 '믿는 사람'과 15%의 '믿을 수 없는 사람' 그런 정도다. 조금 서글픈 숫자이지만 이게 현실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런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쫓겨나 있겠지. 하지만 괜찮다. 인생이란 내가 보는 풍경이므로. 나는 내 믿음과 철학으로 그 풍경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꽤 확신하는 편이다. (물론 나 자신의 판단이라도 절대신뢰를 할 순 없다. 세상에 '절대'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판단은 없다. 어쨌든 '판단을 했으면 확신하는 편이다'라는 말 정도가 타당하겠다.)
얼마 전에도, 한 사람을 인생에서 밀어냈다. 아프지만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인간관계란 본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 5%가 4%가 되고 15%가 16%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나 망설임은 없다. 어차피 내 선택이므로, 그리고 그 선택이란 내가 감수하는 것이므로. 대신에 소수의 남아 있는 이들에게 더 큰 믿음과 사랑을 주면 된다. 그리고 또 누군가로 다시 그 1%가 채워질 수 도 있겠지. 씁쓸하지만 후련하다. 장황하게 늘어놨지만, 이런 결론이라니 조금은 초라하지만, 사실 그게 인간관계의 진실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