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곤, 『낫 아웃』
우연하게도, 스포츠 영화를 3편 연이어 보게 되었다. [리바운드]와 [카운트]에 이어 이 영화까지. 스포츠 드라마라는 장르의 공식을 얼마나 극적인 연출로 잘 구현해 내었는가의 차원에서 [카운트]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 전형적인 장르성에 다소 오글거리는 게 사실이었고, '참 재밌었어!'라는 후련한 마음 한 편에는 어떤 여운도 남지 않는 휘발감이 아쉬웠다. 넷플릭스를 뒤적이다가 또 다른 스포츠 영화 한 편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동 재생되는 영화 속 한 장면이 인상 깊어 무심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최근 TV드라마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주인공의 아버지(정승길 배우) 외에는 알려진 배우라고는 전혀 없는, 인디 영화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영화다. 영화는 영웅의 드라마로 시작한다. 벌써부터 영웅 탄생인가, 싶지만 본래 영웅의 탄생은 시련을 통과해야 하는 법. 갑자기 이렇게 끝내기 안타의 영웅으로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건, 그 이후에는 나락밖에 남지 않았음을 오히려 암시한다. 영웅의 드라마는 단 몇 초. 그리고는 차디찬 현실의 다큐멘터리가 펼쳐진다. 주인공에게 닥친 시련은 더 이상 영웅적 노력 따위로는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을 짓누르는 거대한 벽의 모습을 하고 있다. 벽은 높고 견고하다. 그리고 한낱 가난한 학생인 주인공은 무력하고도 무력하다. 모두를 납득시키며 시련을 넘어서게 해 주는 '실력'이라는 것도 드라마에서나 주어지는 천운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는 고만고만하게 잘하는 친구들이 널리고 널렸으며 그런 친구가 고만고만하게 못 하는 친구들을 앞서봐야 아무런 드라마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렇게 고만고만하게 잘하는 주인공에게 실력은 오히려 '희망'이라는 주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런 희망이 어떻게 저주가 되는지를 영화는 무덤덤하게 훑어준다. 그렇게 영화가 만들어내는 시선의 거리감은 오히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의 잔인함을 증폭시킨다. 상황이 잔인할수록, 주인공의 절박함은 더욱 맹렬하고 거세진다. '아직은 죽지 않았어, NOT OUT' 그것은 희망의 메시지인가 저주의 주술인가.
대한민국에서 스포츠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영웅의 스포츠 드라마처럼 그렇게 집념의 노력과 위대한 성취로 연결되지만은 않는다. 이 나라의 스포츠 권력이 어떻게 내부로부터 곪아 있으며, 그 부조리와 불공정이 얼마나 대단한가는 지나가는 소문만으로도 익히 알 수 있을 정도이며 그 역사도 길고 뿌리가 깊다. 디지털 민주주의의 21세기에도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부끄러운 전통(?)은 여전히 살아있고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어린 희망들의 마음은 오늘도 꺾이고 있다. 오래전부터 여기저기서 많이 다루어 온 소재지만, 그 현실이 여전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현실의 한가운데를 응시하고 고발하는 이런 영화의 존재는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소중하다.
그리고 굳이, 현실 고발이라는 영화의 사회적 역할이 아니더라도, 주인공의 절박함을 생생하고 쓰리게 공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영화의 솜씨는 훌륭하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닥친 현실을 보여줄 때는 저 멀리서 거리를 두게 하고, 야구에 대한 주인공의 절박한 희망에 이입할 때는 가까이서 파고들게 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줌 인과 줌 아웃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 조절은 절묘하다. 그리고 영화의 무게를 짊어진 채 휘청거리면서도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재광 배우(주인공 광호 役)의 열연을 추켜세우지 않을 수 없는 영화.
각본: 이정곤
감독: 이정곤
출연: 정재광, 이규성 외
개봉: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