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행동론에서 디지털 행동론으로 #3
한 번 지난 시간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 중에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혹은 미래와 과거가 공존하는 경우가 실제로 존재하기도 한다. 바로 꿈속이다. 꿈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임은 틀림없지만 현실에서의 법칙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 상상 속에 존재하는,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만들어내는 세계이니 만큼 우리 마음대로 전개될 수도 있다. 현실에서의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에 현실을 닮아 있기도 하지만, 꼭 현실과 같은 법칙으로 구성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꿈속의 세계를 다룬 영화 [인셉션]은 시간의 흐름이 현실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꿈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시간도 공간도 꿈속에서는 현재와 다르게 움직인다. 공간은 얼마든지 뒤틀릴 수 있고 중력의 법칙 따윈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1초가 꿈속에서는 1시간, 1일, 1년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어떤가. 휘어진 공간의 뚫린 구멍(블랙홀)을 통해 미래와 과거가 만나는 후반부의 장면은, 이해하기는 힘들어도 새롭고 환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세상이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을까? 혹은 얼마나 혼란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울까?
꿈처럼, 영화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간이 뒤로 흐르지도, 혼재되어 있지도 않으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세상, Digital World는 얘기가 좀 다르다. 물론 디지털 세계에서도 시간은 미래로 흐른다. 스마트폰 상단 오른쪽에는 항상 시계가 표시되어 있고 이 시계는 당연히 미래를 향해 흐른다.
SNS에 올라온 글도 게시된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어 있어 어떤 글이 먼저 올라온 글인지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디지털 세계에서의 시간은 미래로만 흐르는 걸까?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을 선형적으로 경험하고 있는가?
디지털 세계에서 시간이란 의미가 있는 경험의 형식인가? 상상 속 세계인 꿈에서 물리적 시간과 공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상상 속 세계인 디지털 세계에서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 또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상대성 이론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시간의 흐름은 공간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은 자연의 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공간은 변하고 그 공간의 물리적 변화를 통해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외부와 차단된 하얀 방 안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시간을 체감할 것인가? 과연 그 방안에서는 시간이 미래로 흐르기만 하는 것일까? 아니 ‘미래로’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실제로 한자어 ‘우주(宇宙)’는 사전적 의미로는 집(House)을 가리키지만, 고서의 유래를 보면 공간(宇)과 시간(宙)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맞물리는 관계를 통해 펼쳐진 물리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전개되는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 법칙에 따라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곧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원리를 따르자면 우리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세계, 디지털 세계가 반드시 현실과 같은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따른다고 보장할 수는 없으며, 그렇다면 그 경험의 형식도 현실에서 시공간을 경험하는 형식과 다를 수 있다. 결국, 디지털 세계에서의 시간은 미래로 흐르지 않을 수도 있고 과거와 미래가 혼재될 수도 있으며, 혹은 멈춰 있을 수도 있다. 디지털 공간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라. 우린 손가락만 까딱하면 전 세계 어디든 이동할 수 있지 않은가?
이쯤 되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시간과 공간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만도 할 것이다. 왜인지는 간단하다. 기존의 소비자 행동론 모형에 대한 전면적인 변화, 혹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디지털 시대에 맞는 모형 수정이 필요하다는 말 이상의 중요성과, 지금까지 현실 세계에서의 인간 경험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진다는 점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즉,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디지털은 단순한 기술의 혁신 이상의,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의 창조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그런 세상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형식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달라진다는 측면에서 소비자 행동을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 경험에 대한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 같은 경험의 질에만 있지 않다. 무서운 것은 우리가 겪는 경험의 양(시간과 공간 모두)을 통해 현실 세계보다 디지털 세계가 더 커질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사용 시간의 폭발적인 증가를 보라)
우리는 아직까지는 디지털 세계의 경험을 현실의 모사로 바라본다. 그러니까 현실이 확장된 세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TV가 그러하다. 현실 속에서의 경험, 그것이 감각적 경험이든 정서적 경험이든, 사회적 경험이든 현실에서의 경험과 닮아있다는 측면에서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독립된 세계라기보다는 모사된 세계로서의 의미가 크다. 즉, 현실의 연장이자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물리적 확장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디지털 세계는 더 이상 현실의 확장, 모사된 세계로 보기에는 그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은 인간이 경험하는 양의 측면에서도 디지털 세계가 현실 세계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또한 경험의 질은 완전히 다른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갖춰가고 있다. 이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을 통한 SNS 사용 이상의,
가상 세계에 대한 오감의 경험 형식에 이르게 되면 인간 경험의 질적 전환이 더욱더 거대하게 일어날 것이다.
정리하자면, 디지털 세계의 시간과 공간 자체가 실제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구성되고 감각됨에 따라서 인간이 경험하는 형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에 따라 기존 소비자 행동 모형의 전형적인 경험 형식, 다시 말해 선형적인 시간, 구분된 공간이라는 경험 패턴(인지→관심→기억→욕구→검색→구매)의 전면적 재고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 본 글은 한국광고총연합회가 발간하는 [광고계 동향], 2015년 11월호 (Vol.296)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