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표백]
작가는 지금 시대를 이렇게 부른다. 미국의 헤비메탈 밴드 '마릴린 맨슨'의 앨범 [Mechanical Animals]의 첫 곡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그 단어의 뜻만으로도 뭔가 으스스한 구석이 있다. 여기서 착안했을까, 작가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20대 청춘을 보내고 있는 세대를 '표백 세대'라고 부른다. 왜 표백일까, 왜 화이트 월드일까.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 pp.77~78.
1990년대, 소련의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회의는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저항운동, 진보운동의 이론적 축을 이루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그 현시(現視)로 이론의 근거처럼 군림하던 실제 국가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무너진 대안을 여전히 붙들고 외치는 저항의 목소리는 마치 열등감에 빠진 어린아이의 과장된 몸짓처럼 초라해져 갔다.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손쉽게 세계를 집어삼켰고 자본주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끝이 없을 것 같은 망망대해의 바다를 나침반도 없이 유유자적 항해해 나가고 있다. 배는 흥겹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유람선의 외관을 하고 있지만, 다들 자기 몫의 쾌락 한 줌을 쥐고는 있지만, 사실 유람선의 존재는 그것을 소유한 일부 가려진 사람들의 신선놀음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우린 그 유람선을 움직이는 손발로 풀칠하며 살아간다.
그런 망망대해의 바다를 일컫는 말이라 생각한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는. 그리고 그런 망망대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그저 번호표를 받아 타게 된 선박의 항해에 이끌려 떠다니는 신세가 우리들 개인이다. 자본주의라는 배 안에서는 개인의 개성과 취향이 보장되는 것 같지만, 그건 고작 몇 개의 액세서리와 통신기기, 좋아하는 배우와 인기 드라마로 대변되는 작은 소비 아이템들이 전부. 그마저도 지옥 같은 경쟁과 취업난을 통과해야 얻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개인의 정체성이란 보잘 것 없는 소비로만 겨우 드러낼 수 있는 작은 몸짓,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은 사치가 되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어려운 미션 같은 것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사회질서 속에 안착한 개체의 하나가 되어야 하는 삶. 그 개체가 되기 위한 과정을 작가는 '표백'이라 부른다. 그리고 더 이상 저항해야 할, 진보를 위해 싸워야 할 대상도 힘도 잃어버린, 무엇보다 자신들만의 이데올로기, 자신들만의 세계관, 자신들만의 가치를 잃어버린 세대. 그리고 그로 인해 짊어지고 살아야 할 거대한 무기력과 공허.
그 무기력과 공허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은 그들이 느끼는 무기력과 공허가 얼마나 처절한가에 대한 반증이자, 싸워야 할 대상을 잃어버린 파이터의 무기력과 공허를 또한 암시한다. 나는 너무도 힘겹지만 왜 내가 힘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는 모르고, 분노와 화가 치밀지만 표출해야 할 대상을 찾지 못한다.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고 완벽하게,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잘 돌아간다. 그리고 사회와 타인의 무관심 속에 나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스스로 세워나가려 노력하는 나의 정체성이란 초라하기 그지없는 스펙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돈을 주고 사야 하는 나만의, 아니 누구든 갖추고 있을 아이템들.
인류의 역사상 젊은 세대가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존재감을 위협받았던 적이 있었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도 정치를 이용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를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왜 이렇게 되었을까. 단지 자본주의 때문일까. 인간이 경제 시스템에 이렇게도 철저하게, 몸과 영혼이 모두 종속되고 굴복된 적이 있었을까. 이건 단지 자본주의 시스템의 힘 때문만일까. 그렇다면 우린 계속 이렇게 갇힌 채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을까. '자살'같은 행위로 반항하는 게 최선일까. 그렇다면 무엇이 최선일까.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솔직히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런 말이 어쩐지 신뢰가 된다. 왜냐하면, 모르겠다는 말은 그만큼 앞으로의 비전과 대안에 대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고민한 과정이 있기에 섣불리 대안을 말할 수 없다는 뜻이고, 그리고 그들 - 바로 표백 세대의 눈높이에서 처절하게 고민해 봤기 때문이리라. 그 고민의 흔적이 바로 이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세연이 펼치는 주장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이 다루는 가능성은 20대를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실에 나는 약간 죄책감을 느낀다. 이것도 일종의 착취에 해당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 '작가의 말' 中
그의 말은 일면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의 그 '모르겠다'라는 말에서 오히려 희망을 찾는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는, 이전의 사상이나 이론, 이데올로기와 가치관 등을 간편하게 가져와 그대로 이식하는 방법을 통해서는 오히려 반발을 살뿐이다. 어쨌든 그건 역사적으로 좌절된 실패한 방법론인 것이다. 과거의 것을 다시 들고 오는 건 그들에게 그저 허울 좋은 훈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결국 그들은 더욱더 엇나갈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거대 서사의 종언'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거대 서사(Master Narrative)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철학자 리오타르가 제시한 개념으로, 국내에서는 9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유행과 함께 유령처럼 떠돌던 말이다. 그는 계몽주의, 마르크스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등과 같은, 세계를 이해하고 해결해 나가려는 관점이자 방법론인 사상들 - 정치 이데올로기, 거대 담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시대로 현대사회를 규정한다.
거대 서사가 사라진 시대란 우리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삶의 비전, 삶의 철학이 사라지는 시대를 의미하며, 때문에 우리는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할 수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각자가 원자화된 자유와 원자화된 책임을 짊어진 채 원자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동시에 원자화된 개인은 자신이 기대야 할 믿음을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난제에 부딪치게 된다. 마치 그동안 걷던 길이 사라지고 사람들도 사라진 채 사막 한 가운데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길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주변엔 신기루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우리의 욕망을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거대 서사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거대 서사의 무조건적 거부가 답이 아니란 걸, 그것이 저항이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땐 우리에겐 그리고 우리 주변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우린 또다시 홀로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며 호기롭게 신을 버렸지만, 자 그렇다면 누굴 믿고 어디로 갈래? 하며 악마의 환영이 나타나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하지만 새로운 거대 서사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인간은 나약하다. 그리고 탐욕적이다. 인간이란 그런 동물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놀라운 잠재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며, 서로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한다. 인간은 나약하지만 강하고, 탐욕적이지만 박애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어떤 마음이 인간을 움직이게 만들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나약함과 탐욕 위에 설계된 지도이다. 그것은 꽤 오랫동안 자동적으로, 그리고 발전적으로 작동해 왔다. 인간의 본능에 합한 시스템이기에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면으로 안내하는 지도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건 자본주의가 무리 없이 작동해왔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렇다.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본능을 거스르지 않고, 그 본능의 발현에 부합하면서도 인간을 아름답게, 삶을 가치롭게,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그런 지도. 긍정적 삶의 새로운 거대 서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를 대체할 수 있는 그레이트 빅 _______ 월드 같은 것.
너무 거대했나 싶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저자의 치열한 고민을 이 소설을 통해 마주하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고, 예전에 묻어두었던 비슷한 고민들이 다시 수면 위로 폭발하듯 떠올랐다. 그래서 두서없지만 일단 잡문으로 남겨놓는다.
오랜만에 이런 의미 있는 고민을 하게 해 준,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나 무기력하고 공허한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를 들춰내고 고발하고 고민하고 좌절할 수 있게 해 주어 또한 고맙다. 스스로의 뼈를 깎는,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세상의 어둠을 들춰내는 이런 고민의 과정이 없다면 우린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의 거대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시대다. 이러한 시대를 자각할 수 있도록 시동을 걸게 만드는 든든한 연료를 발견한 것 같아 감사하고 뿌듯하다.
그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