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마루야마 겐지와 해적왕 루피의 인생론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다.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 [나는 길들지 않는다]에 나오는 구절 중 가장 깊게 뇌리에 새겨진 말이다. 왠지 멋져 보이기도 하지만, '정말 이렇게 살고 싶다'라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이 말이 뇌리에 새겨지면서 동시에 즉각적으로 연상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주인공인 루피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만화라는 [원피스]는 한 해적단의 선장인 루피가 '해적왕'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사실 스토리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고 작품은 그 이상의 무언가 - 세계관과 가치관을 담고 있는 명작이다. 원피스라는 작품과 루피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참으로 할 말이 많기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리뷰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루피가 떠올랐던 이유는 이렇다. 그가 꽤 성장해 이야기의 중반부를 넘어갈 때쯤 마루야마 겐지가 했던 말과 매우 흡사한 대사를 한 적이 있다. 왜 해적왕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지배 같은 건 안 해,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녀석이 해적왕이다!
이 말은 이 작품이 지향하는 가치관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루피라는 인물의 무모하지만 보는 사람을 후련하게 하는 행동을 가능케 하는 신념이라 할 수 있다. 루피가 신념으로 삼는 이러한 '자유'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의 행동들은 무모하기 짝이없는 멍청한 짓이 되고 만다.(실제로 루피가 극중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멍청하다'일 듯)
이 드라마가 그토록 감동적이고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이 '해적왕'에 대한 정의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통상 만화에서 등장하는 'OO왕'이 담고 있는 숨은 의미인 '가장 센 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가령 드래곤볼의 손오공은 가장 센 자가 되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며, 손오공이 밟아나가는 단계적 미션 클리어 구조의 스토리는 그런 강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위한 장치이다. 원피스의 스토리 또한 드래곤 볼의 단계적 미션 클리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작가는 '해적왕'의 의미를 단지 궁극의 강자로 설정하지는 않는다.
강자는 권력을 의미하며 권력은 곧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루피는 권력을 지향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는 권력을 부수는 자이다. 그럼으로써 그가 얻는 가치는 바로 '자유'다. 그리고 그 자유는 아무거나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방종'의 의미가 아닌, 지배받지 않는 상태, 아니 지배를 거부하는 주체성을 의미한다. 또한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권력이 아닌 '자유'다. 이 지점에서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와 마루야마 겐지는 통하고 있다. 루피가 지향하는 자유의 상태를 마루야마 겐지는 '자립'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즉,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고, 누구도 지배하지 않아 자유롭지만 자신의 생존은 온전히 스스로 책임지는, 완전한 자립의 상태다. 바로 원피스에서 루피가 지향하면서 동시에 그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존립 근거다.(실제로 루피와 그의 해적단은 수 많은 미션 클리어를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 헤쳐나가려 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자립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그를 돕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
마루야마 겐지가 모든 그의 에세이에서 반복적으로 말하는 자립, 정확히는 '자립하는 젊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누구에게도 삶의 생존을 의지하지 않으며,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본래 모습대로 선택하고 행동하되 누구의 지시에도 따르지 않고 누구도 지시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자립이며, 자립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이에 상관없이 젊음을 누린다는 면에서, 그것이 가장 인간이라는 동물의 전성기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자립하는 젊음이다. 그리고 그 자립하는 젊음을 누리고 산다는 건, 누리는 것이 아닌 세상과의 투쟁을 통해 매 순간 얻어내야 하는 것이므로 힘겨운 고난의 과정이다. (루피의 밀집모자 해적단을 보라. 그와 그의 동료들이 자립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는가. 그리고 그 힘겨운 여정을 견디고 이겨내는 힘은 '동료애'에 있다. 동료애는 자립 못지 않은 이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어린 시절, 미리 준비된 교육과 투자를 통해 안정적인 생존수단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런 고난의 길에 굳이 들어서서 자립이라는, 겉으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심리적 만족을 획득하려는 시도를 원천봉쇄한다. 때문에, 이런 미련한 짓을 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루피 또한 다른 해적과는 다르게 굳이 항상 힘든 길을 선택하여 헤쳐나가며, 결국 그들은 '자유'라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것이 원피스가 다른 전투 애니메이션의 미션 클리어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진정한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진정으로 행복한가? 후회하지 않는 삶이란 어떤가? 그러니까,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참 어려운 질문이면서 동시에 답이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이라면 끊임없이 되묻게 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우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갈구하며 헤메인다.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만 수십 년이 걸렸지만, 그걸 안다 해서 질문이 멈추는 건 아니다. 결국은 자기만의 답을 내야만 하는 것이다. 인생이란.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은 없지만 답을 내야 하는 질문. 인생 최대의 딜레마이자 수수께끼.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순환하는 질문과 답의 엇갈린 구조.
하지만, 또한 정답이 주어져 있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적당히 합의된. 그 정답은 굳이 늘어놓지 않아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그런 길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가족을 꾸린 직장인'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바로 그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때문에 마루야마 겐지는 그토록 '직장인의 삶'을 공격한다. 마치 큰 죄라도 진 것처럼 직장인, 정확히는 직장인으로서의 마인드를 해부하고 심문한다. 독자가 직장인이라면 읽기가 불편할 정도다. 하지만 그가 굳이 직장인을 콕 집어서 공격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그가 말하는 '자립한 젊음', 또는 루피가 지향하는 '지배하지 않는 자유'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거대하고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 바로 직장이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원피스에서도 이런 '직장'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주인공의 자유를 봉쇄하고 노예의 삶을 만들어 내는 그곳. 작품 내에서는 해적단의 일원이 되는 나미가 일하던 사무실(지도를 제작하는)로 상징되는데, 루피는 나미를 위해 이 사무실, 건물을 무참히 때려 부순다. 그때 나미가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은 바로 노예의 삶으로부터 벗어난 해방감, 희열의 카타르시스다.
직장이란 인간의 자립을 방해하고 자유를 속박하기에 진정한 행복, 진정한 인생, 진정한 나를 앗아가는 가장 큰 적이 된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쓸모없는 정답이 되어 주며, 궁극에는 질문 자체를 잊게 만든다. 결국 인간은 직장이라는 입마개를 덮어쓰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봉합해 버린 채, 가장 무기력하며 가장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원적 생존 에너지를 거세당한 채 살아가는 초라한 존재가 되고 만다.
예술가란, 사회적인 질서에 갇혀있지 않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계속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기도 하고, 그래야만 그들은 살아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주어진 질서가 없으므로 스스로 삶의 길을 내야 하는 사람들이므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정하기 위해서는 질문이 필요하고 답을 내려는 노력이 동반된다. 그리고 그 노력의 흔적이 그들이 걸어가는 길의 자취가 아닐까.
마루야마 겐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자립한 젊음'으로 정했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옳든 그르든 좋든 아니든 그 난해한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일이다.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 또한 비슷한 답, '지배하지 않는 자유'를 내놓고 있다.
최근에 내가 열심히 따르며 구독하고 있는 만화가 김보통 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도 비슷한 맥락이다. 무엇이라 정의하고 있진 않지만, 누구의 지시도 따르지 않는 '나만의 길'이라는 측면에서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나대로 내 길을 간다. 이제는 어느 것에도 붙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하며 내 삶을 살아가기로 한다. 최선을 다해 살면, 언젠가 우리는 어느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서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다. 내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 바쁘다.
그리고, 20세기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 할 수 있는(내 생각일 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도 비슷한 말이 등장한다.
아니에요. 보스(작가)는 자유롭지 않아요. 그저 당신이 묶인 줄이 다른 사람들보다 길뿐이에요. 그 긴 줄 끝에 앉아 오가니까 그걸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걸 잘라버리지는 못합니다. 그런 줄을 자르지 못하는 한은..
보스,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라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하거든요.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 걸어야 해요. 하지만 당신은 좋은 머리가 있으니 잘해 나갈 수는 있겠네요. 인간의 머리란 게 가게 주인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을 해 대죠.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내주었으니 이익이 얼마고 손해가 얼마구나! 머리라는 게 이렇게 좀스러운 가게 주인인 거예요. 가진 걸 다 걸어 보려고는 않고 꼭 예비금이라는 걸 남겨 둡니다. 그러니 줄을 자를 수 있겠어요? 아니지요. 더 꼭 붙들어 맵니다. 만약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바보는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댑니다. 그러면 끝장이지요. 하지만 인간이 이 줄을 안 자르면 살맛이 나겠어요? 그거야말로 멀건 카밀레 차를 마시는 기분일 거요. 럼주 같은 맛이 아니라. 자르지 않고 인생의 맛을 보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중
예술가들이 모두 이렇게 비슷한 얘기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진정한 답이란 그들의 말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