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이상문학상 수상자 김경욱의 소설 쓰기
소설가 김경욱 씨가 드디어 이상 문학상을 탔다. 굳이 '드디어'라는 부사어를 붙인 이유는 그의 소설이 갖는 작품의 질 뿐만이 아닌 양 때문이기도 하다. 20여 년 동안 여섯 권의 장편 소설과 일곱 번의 소설집을 낸다는 건, 그러니까 1년에 1권 이상의 책을 꾸준히 발간했다는 것이고 그런 빈도의 소설 집필이란 단지 부지런함을 넘어선 집념에 가까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소설 단위로 따지면 1년에 약 4편 정도가 된다. 세상에)
무엇이 그를 그토록 쓰게 만드는 걸까. 소설가 그 자신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그의 가장 최근 단편소설집인 [소년은 늙지 않는다]에 수록된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사회자가 토론자들에게 왜 소설을 쓰느냐고 물었다. ... 나는 얼결에 대답했다.
저는 소설을 쓸 때 가장 평화롭습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가슴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가장 치열하고 고통스러울 글쓰기, 그것도 소설 작문을 두고 평화롭다니. 도대체 '평화롭다'는 상태가 소설 쓰기와 어울릴 수 있을까.
난 소설을 써보지 않았지만, 그렇지만 왠지 이해할 듯도 했다. 예전에 일본의 한 소설가(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엔도 슈사쿠라는 작가)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또한 소설 쓰기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내가 소설가라는 일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도 괴로운 것은 괴로웠다. 물기 하나 없는 수건을 짜서 물을 짜내야 하는 듯한 괴로움도 몇 번이나 있었다.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몇 번이나 높은 산을 올라 겨우 양지바른 평원을 보는 듯한 느낌이 되기까지 상당한 세월이 걸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노고에도 불구하고 항상 즐거움이 따랐던 것은 분명하다. 행복하게도 소설은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었다.
분명 괴롭습니다. 하지만 왠지 즐겁습니다. 나는 그것을 '괴로운 즐거움'이라고 부릅니다.
괴롭지만 즐겁다니. 이 말은 말도 안 되는 논리적 모순이지만, 그건 사실 '논리 안에서만' 모순일 것이다. 삶이란 논리가 아닐 테니 말이다. 우리도 가끔 이런 경험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운동 경기를 할 때, 혹은 노래를 부를 때, 아니면 여행을 다닐 때. 반복 연습에 몸이 피곤하기도 하고,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절실한 고민을 거치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고 끊임없이 가야 할 길을 모색해야 하므로 신경이 곤두선다. 이런 과정에서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동반할 수밖에 없고 가끔씩 포기하고 싶고 짜증 날 때도 있고 두려울 때도 있지만, 그 과정을 내가 직접 주도하고 과정 속에 몰입해 간다면 왠지 모를 성취감, 희열감, 카타르시스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괴롭지만 그 괴로움으로 온전히 몰입하게 되고, 몰입의 과정에서는 나 이외에 나를 방해할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온전히 내가 내 뜻대로 만들고 움직이는 세계다. 때문에 그런 과정을 통해 토해낸 결과물은 온전히 자신의 성취가 된다. 오로지 내가 만들어낸 흔적이자 나의 분신 같은. 과연 그런 성취보다 더 성취감이 있을까. 그리고 그런 느낌이 또 그리워 계속 그 일을 멈추지 않고 하게 되는.
산악인 엄홍길 씨를 떠올려 보자.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가. 심지어 죽음마저 무릅쓰고, 그 높고 깊고 춥고 배고프고 위험한 곳을 오르는가 말이다. 그런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 또한 아주 어처구니가 없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웃지 못할 대답은 그 어처구니 없는 의미 때문에 오히려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왜 그 길을 가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이런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토론에 함께 참여했던 외국인 작가는 뉴욕 여행 중 나에게 불쑥 물었다. 왜 그리 열심히 쓰냐고. ... 나는 잔뜩 굳은 얼굴로 역시 짧게 대답했다.
견디기 위해서
견딘다니, 과연 무엇을 견딘다는 말일까. 이 문장에 숨겨진 목적어는 무엇일까. 그러니까 소설 쓰기가 견디게 해준다는 의미일 텐데, 소설가가 견뎌야 할 건 소설 쓰기가 아니란 말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본다. 무슨 말이지 도대체?
나는 이렇게 추측해 본다. 아마도 그의 견딘다는 말의 목적어는 '삶'이지 않았을까. 혹은 '나'일 수도 있겠다. 나를 견디기 위해서, 삶을 견디기 위해서. 그저 쓰는 과정을 통해 나는 살고자 하는 나를 견디는 것이고, 삶의 온갖 무게를 견디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소설 쓰기의 과정이, 소설 쓰기가 아닌 모든 삶의 무게, 나의 무게를 견디게 해 주는 버팀목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로 우리의 삶을, 살고자 하는 나를 견디고 있는가? 우리는 혹시 우리가 하는 일을 견디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 일을 하는가? 단지 그 일을 견디기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고 있는 것일까?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떠올려 본다.
저는 소설을 쓸 때 가장 평화롭습니다.
평화로운 인생이란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삶이 아니었던가. 그런 삶이, 그런 세상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그 평화의 비밀을 얻기 위해, 부처는 3년간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수양을 해야 했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처형을 스스로 감당하며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간이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건만, 소설을 쓰는 것만으로 평화로워질 수 있다니.
이제는 그가 왜 그렇게 많은 소설을 단기간에 써 내려가는지 알 법도 하다. 그는 가장 평화로운 자신의 삶을 위해, 아니 단지 평화로운 삶 자체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래서 그저 쓰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소설 쓰기에 몰입하며 살기를 몇십 년 하다 보니, 그에게 큰 상이 내려졌다. 소식을 듣는 순간 그 상을 받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여전히 날이 서 있을(조금은 어렵지만) 그의 작품이 궁금해져 단편집을 찾아 읽어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난 그가 한 없이 부러웠다.
소설 쓰는 일이 가장 평화롭다는 그의 말과는 달리 그의 소설은 그다지 평화롭지 않다. 반대로 아주아주 치열하고 우울하다. 마치 디스토피아를 보는 것처럼. 유토피아의 마음으로 써 내려간 디스토피아라니.
그의 작품에는 시대에 대한 공감이 있고, 문제의식의 날이 서 있으며, 시대의 삶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사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그냥 읽어 내려가기에도 쉬운 책이 아니다. 가끔 왜 이런 이야기, 이런 인물, 이런 결말이어야 하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난 문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뭘 잘 몰라 그럴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의 작품을 읽는 이유는 그의 작품에서 '진정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목받는 작가의 작품에서 흔히 드러나는 '나는 문학성 있는 작품을 쓰고 있어'라는 욕심과 강요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그저 그의 말과 그가 말하는 대상과 그가 말하는 대상에 대한 그의 생각만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소설가 자신의 과도한 자의식이 뒤로 물러서 있다고나 할까. 가끔 노래에서도 그련 경우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어느 대형가수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나 노래 잘해!'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보다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듣다 보면 그 노래가 내 마음에 닿아 왠지 울컥하게 되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그러니까 가수보다는 노래를 듣게 되는. 그의 소설이 그렇다. 소설가 보다는 소설 자체에 몰입하게 되는 그런 소설. 그래서 어렵지만 그의 글은 왠지 '진짜'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가끔씩 생각나고 찾게 된다.
소설집 뒤편에는 친절하게도 평론가의 해설이 담겨 있는데, 난감하게도 평론이 소설보다 더 어려워서 여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그의 작품이 왜 작품성이 있는가를 대변해 줄 만한 몇 가지 문장을 옮겨 적어본다.
이 세계의 물리적/논리적 인과를 재현하기보다 이 세계의 인과가 실패한 곳에 출현한 증상을 통해 새로운 인과를 마련한다. ... 이들(소설 속 주인공)은 현실의 작동에서 도피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오작동하는 지점, 현실의 물리적 논리적 인과가 실패를 드러내는 지점에서 튕겨져 나온 편에 가깝기 때문이다.
읽은 것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되고 비개인적인 지식의 일부를 이루겠지만, 그것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서부터 새롭게 창조된 것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김경욱의 창조성이다.
- 백지은 평론가의 해설, '잘하는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중
주저리주저리 넋두리를 늘어놓느라 정작 쓰려고 했던 말을 하지 못했다. 내 얘기만 잔뜩 써버리고 말았지만, 어쨌든 그래도 마지막에는 그를 위한 말을 남겨놓는다.
이상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