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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Apr 25. 2016

이해받지 못한 자의 슬픔

이윤기 감독에 대한 작가주의론

아주 오래전, 아니 불과 10~20년 전 영화계는 작가주의 감독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대중들의 존경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작가주의 감독이라 한다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일관된 주제가 있고(그 주제가 사회적이든 개인적이든) 그 주제를 영화로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결과 고유한 주제 의식과 인물 캐릭터, 갈등의 전개 방식, 촬영과 편집의 스타일까지,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구축하는 경우라 하겠다.


물론 지금도 모든 영화감독은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좀 더 엄격하게 들여다보자면 당시와는 질적으로 달라진 면이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본격적인 산업화 과정으로 접어들었고 그에 따라 자본에 의해 제어되는 영화 제작 시스템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성과 흥행을 크게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에(예전에 비해 더더욱), 작가주의를 지향하고 유지해 나가기에는 한계와 제약이 더 많아진 건 사실이다. 그리고 많은 감독들 또한 예전만큼 특정한 주제의식에 천착하기보다는 좀 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컨텐츠로서의 영화라는 측면을 지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경향성은 제작이나 감독의 의도라기보다는 지금의 시대에 영화가 감상되고 소비되는 방식이 예전과는 현저히 달라졌다는 매체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더 합당하겠다 싶다.(물론 그 배후에 존재하는 자본과 시장이라는 시스템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영화가 데이트하는 연인들의, 혹은 주말 나들이를 위한 가족들의 Killing Time 용 컨텐츠로 애용되고 있다는 현실은 모두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영화는 Killing Time용 컨텐츠로 소비된다


서론이 길었다. 무거운 주제이므로 대략 패스하고. 하여간 그 당시 많은 감독들이 작가주의를 지향하던 시절,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가 현대인의 고독, 소외와 같은 무겁고 우울한 것들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왕가위 감독, 키타노 다케시 감독 같은 분들이 계시고 국내에는 김기덕 감독도 계시지만, 재미있는 건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지금의 환경과는 달리 그런 영화들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기대가 바뀌었기 때문도 있겠지만, 어쩌면 너무도 현실적인 주제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피부로 체험하고 가슴 한 구석에 담아두고 있는 공허를 굳이 들춰내 스크린에서 확인하고 싶지 않은 심리라고나 할까. 현실이 우울한 만큼, 영화는 판타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찾는 소비용 컨텐츠가 된다. 이런 순환 구조도 왠지 우울하지만.


왕가위 감독(좌), 키타노 다케시 감독(중), 김기덕 감독(우)


다시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현대인의 고독이라고 한다면 단번에 머리 속에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대만 감독 차이밍량의 [애정만세]다. 영화 제목은 왠지 청춘들의 로맨틱한 이야기를 담고 있을 듯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정 반대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영화랄까. 영화는 일단 이야기가 없고 대사도 거의 없다. 주인공들은 우연히 스쳐가지만, 그저 우연일 뿐이고 그야말로 '스쳐'간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여주인공이 공원 벤치에 앉아 우는 마지막 장면인데, 놀라운 것은 카메라가 미동도 하지 않고 원 숏으로 17분가량 이어진다. (너무나 놀라워서 직접 시간을 재봤던 기억이 난다.) 17분. 카메라는 멈춰있고 여자는 아무런 대사 없이, 특정한 이유 없이 그저 운다. 아마도 소외된 그들의 삶을 표현하기엔, 이런 방식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겪는 소외감에 구체적인 이유를 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진실에 가깝지 않다.


영화 [애정만세(Vive l'amour)]의 마지막 장면


이윤기 감독의 영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보며 애정만세가 떠올랐다. 이 영화 역시 제목만 보고 뚜껑을 열어보면 무지하니 실망할 영화다. 현빈과 임수정 주연이라는 양념도 별반 소용이 없다. 사실 누가 배우였던들 상관이 없을 법한 영화라고나 할까. 영화는 유난히 한 숏 한 숏이 길다. 공간을 의미 없이 3~4초가량 비춰준다거나(나름대로 의미가 있긴 하겠지만), 주인공들이 배회하는 동선을 그저 따라가 보여준다거나, 요리 프로그램도 아닌데 면을 끓이고 마늘과 호박, 가지 볶는 장면을 물끄러미 실시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전혀 해피하지 않은, 결국 영화의 시작과 다를 바 없는 공허한 결말.


영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오프닝 컷


포털 사이트 영화 리뷰란에 보니, 어떤 네티즌이 이렇게 써놨다. "극장에서 볼 필요는 없고, 비디오로 나오면 5배속으로 돌려 보면 되는 영화". 감독이 듣자면 참으로 아픈 말이겠지만, 지금의 시대라면 관객들이 보일만한 반응의 전형이라 하겠다. 그리고는 놀라웠다. 아직도 이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었네. 이런 영화에 투자하는 제작자가 있었네.라고.


감독의 최신작 [남과 여] 또한 마찬가지다. 불륜이라는 소재, 정통 로맨스라는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래서 전작보다는 대중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역시 대단히 느린 전개에 대단히 허망한 결말을 맺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멜로드라마를 보는 이유, 욕망에 대한 해소를 전혀 해주지 않은 채 오히려 멜로드라마와 거리를 두고 있다랄까.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취하면서 멜로드라마와 거리를 둔다라니. 이 정도 되면 관객들은 농락당했다는, 배신감마저 들기 마련이다. 흥행 실패라는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영화 [남과 여] &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포스터


이토록이나 관객을 배반하는 영화를 보는 건 아주 오랜만의 경험이다.(물론 인디 영화, 단편 영화를 보지 않게 된 나라는 사람의 게으름 탓이 크겠다만) 그리고 왜 이렇게 영화를 만들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 답은 아주 단순하다. 감독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주목한 주제에 대하여. 그리고 그 주제란 좀처럼 사람들이 다루길 꺼려하는 그 현실, 현대인의 고독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다. 그 보편적이고 지리한 명제를 다시 밝혀봐야 역시 지리할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궁금하다. 왜 우린 이렇게 고독해야만 할까.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꼭 보편적인 철학이나 심리학 이론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내가, 왜 고독한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조선시대 세종대왕도 외로웠을 거야 따위의 말은 아무런 위로도 아무런 해소도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외롭지 않은 인생, 따뜻한 관계,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 이윤기 감독이 하고 싶은 대답은 '몰이해'다.


* 유의: 여기서 부터는 영화 전체 줄거리가 노출됩니다.


영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보면, 이혼을 앞둔 두 주인공은 서로를 극진히 배려한다. 헤어짐을 앞둔 부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과도한 배려다. 왜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는 걸까. 그것은 상대를 위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기 보단 상대의 마음에 더 이상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제스처와도 같다. 마치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최대한의 배려를 해주는 것처럼. 그것은 상대를 그만큼 생각해서라기 보단, 그 사람으로부터 나를 지키고자 하는 안간힘이다.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날 다치게 하지 말라는 싸인이다. 영화 속 부부가 그러하다. 더 이상 다치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을 상대에 대한 과도한 배려 - 거리두기를 통해 지키려는 것이다. 결국 그 배려가 오히려 서로를 소외시키는 태도가 된다. 배려는 그들 사이의 거대한 벽이 된다.


배려는 오히려 그들 사이에 벽을 쌓는다


부부가 이렇게나 서로 거리를 두고 벽을 치고 있다면, 그것은 그냥 관계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버린 단절된 상황이다. 영화는 90분 내내, 그 배려를 통한 거리두기만을 아주 건조한 시선으로 아주 느리고 답답하게 보여준다. 긴- 원 숏이라는 영화적 형식은 그런 그들의 거리감을 관객들 또한 느낄 수 있게 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보는 내내 답답하고 지루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쩌면 감독이 의도한 바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숨 막힐 듯한 거리를 아내가 단 한번 뚫고 나온 순간이 있다.(그렇지. 이런 순간이 한 번이라도 있어야지) 그 순간 아내 영신(임수정 역)이 뱉는 대사는 이렇다.


"나는 정말로 모르겠어.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인 건지. 아니면 어떤 화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인 건지"

"바람나서 헤어지자는 아내에게 그렇게 나이스 하게 대하는 게 얼마나 이기적인 건지 몰라?"


나는 정말 당신을 모르겠어


사실, 영화에서 둘이 헤어지게 되는 아내의 '바람'이라는 계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그 상대가 누군지 어떻게 바람이 났는지는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중요한 건 그들이 서로 예의를 차려야만 할 정도의 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고, 그 거리는 서로에 대한 '몰이해'에서 온다는 것이다.


과연 남편 지석(현빈 역)은 정말 그토록 이기적인 사람일까. 단지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그토록 배려해 주는 것일까? 지석이 가장 많이 내뱉는 대사는 '괜찮아'다. 그리고 영신은 그 괜찮다는 말에 신물이 나 있다. 사실 괜찮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남자는 괜찮다고 말하고 여자는 그 말로 인해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된다. 남자는 괜찮다는 말로서 자신의 거대한 슬픔을 감추어 자신을 지키려 하고, 여자는 그 말로 인해 남자의 마음속에 들어가지 못한 채 주변에서 서성이다 결국은 밀려난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통로를 닫아둔 채 헤어짐의 순간까지 서로에게 예의를 다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 서로에게 나이스 하지만 서로에게 마음을 닫음으로써 서로를 소외시키고, 그럼으로써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모든 통로에 빗장을 걸어 잠근 그들. 그들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이다.


통로는 서로를 향해 열려있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양파를 썰다가 눈물이 난 남자는 욕실에서 양파 때문인냥 눈물을 쏟는다. 그것이 괜찮지 않은 그의 진실이지만, 여자는 끝내 알지 못한다. 역시 양파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양파는 최후까지 '괜찮은 척' 할 수 있는 마음의 방패가 된다. 그리고 여자는 오히려 거꾸로 '괜찮겠지. 괜찮아질 거야'하며 자조한다. 그건 상대와의 거리를 도저히 좁힐 수 없음에, 상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포기의 한숨과도 같다. 미련을 덮는 자조의 합리화 같은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도 잔인하게, 결국 서로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 속에서 결말을 맺는다. 같이 살았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부부가 이혼의 시점에 와서 갑자기 마술처럼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일 따윈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법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현실을 선택했다.


자신의 슬픔마저 양파의 눈물 뒤로 감춘다


영화의 마지막,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숨어 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먹이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이 고양이를 영신은 가만히 관조한다. 아마도 고양이는 이 영화에서 희망으로 남겨두고자 한 유일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배고프면 먹이를 찾아 나서듯, 외로우면 누군가를 찾아 나서겠지. 그 외로움이 오히려 스스로를 가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하겠지. 괜찮아지겠지...



이윤기 감독의 좀 더 최근 영화 [남과 여]를 보자. 줄거리는 아주 흔한 로맨스의 정석, 불륜의 이야기다. 낯선 이국땅에서 만난 유부남, 유부녀가 뜨거운 관계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와 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는...


그들의 사랑은 뜨겁지만 불안하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갈구했던 욕망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감독은 남과 여의 사랑을 말하고자 했을까. 나 또한 '정통 멜로드라마'라는 마케팅 문구에 끌려 집어 든 영화였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들이 서로를 찾는 이유가 서로에 대한 끌림 때문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걸 알 수 있는 은유는 그들의 가족들에서 찾을 수 있다. 남자 기홍(공유 역)의 딸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 아내도 마찬가지. 그리고 여자 상민(전도연 역)의 아들은 자폐를 앓고 있다. 그리고 남편은 아들의 자폐에 큰 관심이 없다. 아들의 자폐를 처리하는 건 그저 아내의 몫일 뿐이다. 남편은 아들에 대해 조언을 하지만 그건 조언이 아닌 비판일 뿐이다. 나는 옳다는.  그러니까 모두 자기라는 세계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다. 애초의 설정부터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딸과 아내를 둔 남자, 자폐 아들과 무관심한 남편을 둔 여자. 그들의 삶이 어떠하리란 건 대략 상황만 미루어보아도 알 수 있다. 힘겨운 상황에 놓인 둘은 그런 일상의 탈출구로 서로를 찾는다. 하지만 서로는 서로에게 탈출구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서로는 서로가 왜 서로를 찾는지 한 번도 공감하지 않는다. 그저 일상을 마주하기 힘들 때 서로를 찾을 뿐.


그들은 서로에게 탈출구이지만 공감의 관계는 아니다


이런 것이 사랑인가 아닌가. 하는 건 참 어려운 문제다. 내가 힘겨울 때 다가온 사람에게 품는 감정이라 하여 사랑이 아니라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사랑인가 아닌가 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가족들에게서도 기대할 수 없는, 좌절된 갈망. 그건 외로움이자 그 외로움의 원인인 이해받지 못함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버텨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지만 가족은 그들의 힘겨움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지만 그 힘겨움의 깊이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타인이 된 가족을 이해하고 감내해야만 하는 책임자의 역할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역할은 위태로울뿐더러, 무엇보다 지독하게 외롭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힘겹게 하는 건 단지 홀로 있음이 아니다.


이해받고 있지 못하다는 데서 오는 박탈감. 그것이 그들을 고독의 끝으로 몰아간다.


영화 속, 남자의 아내는 우울증과 씨름하면서 남자에게 말한다.


"당신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그 말을 듣는 남자의 표정은 쓸쓸하고 건조하다. 바로 이윤기 감독의 영화 전반에 드러나고 있는 지배적인 정서다. 그 쓸쓸함과 건조함의 뒤에는 이런 말이 숨겨져 있다.


'그래 난 네 마음을 잘 몰라. 하지만 너도 내 마음을 잘 아는 건 아니잖아?'


남자의 표정은 언제나 쓸쓸하고 건조하다. 여자 또한


따지는 말이라기 보단,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자조 같은 마음이라는 게 더 쓸쓸하다. 영화의 결말은 관객들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을 만큼의 배신감을 선사하는데, 그건 바로 남자의 외면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외면이라기 보단 가족으로의 회귀다. 그가 왜 갑자기 가족으로 돌아섰는지 영화는 명쾌하게 개연성을 제시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외연적으로는 아내와 아이에 대한 책임감 때문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그런 설명만으로는 억지스러운 게 사실이다.(그는 애초에 그렇게 책임감 있는 남자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모든 것에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단호하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다.) 실마리는 단 세 문장의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우울증을 떨치고 집에 돌아와 남편 기홍(공유 역)에게 하는 아내의 말이다.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이해한 적이 있었나.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가 그토록 이나 갈망하던 이해를 얻는 순간 그는, 갑자기 책임 있는 가장이 된다. 본래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한 사람에 대한 이해가 그를 책임 있는 가장으로, 나를 보호하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건 영화에서는 비약으로 보일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오히려 더 극적으로 나타나곤 한다.(주변에 가까운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줘 보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 관계의 비밀이란 아주 간단한 것이다.


몰이해는 몰이해를 낳고, 이해는 이해를 낳는다.


이해받고 있는 사람은 상대를 또한 이해하려 하고, 상대를 이해하려 하면 상대도 이해받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정되고 보호받는 느낌을 갖을 수 있게 된다.


남자는 이해받는 순간 그 마법과도 같은 관계의 회복을 맞이하게 됐지만, 여자는 가족과 남자 모두에게 버려지고 만다. 그건 불륜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는 배신이고 배반이지만, 그래서 그 여자가 감당해야 할 상처는 지독하게 남겨져 버렸지만, 어찌 보면 그건 이해가 결여된 사랑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지를 역설하는 결말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사랑을 하는 여자


결말이 지독한 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자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자신의 아이에게마저도 이해받지 못하는 절대 고독에서 결말을 맞는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던 여자와 아이의 통화내용은 소통하지 못하는, 이해받지 못하는 사랑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종화야 엄마야"

"두 달 동안 이자 없이 빨리빨리~"(영화에서 아이가 계속 되뇌어 부르던 대출광고의 CF송)

"그래 나도.. 나도 사랑해"


여자는 택시 안에서 처절하게 흐느껴 운다. 그리고 그녀를 위로하는 건, 생전 처음 보는 택시 운전사가 건넨 담배 한 가치 뿐. 정말이지 지독하게도 결말을 맺어 놓았다.


아마도 감독은 이해받지 못한 자의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 모두가 회피하고 있던, 자신일지도 모를 바로 그 모습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지독하게도 쓸쓸하다




작가주의라고 하기에는 왈가왈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윤기 감독의 영화 두 편을 보고 나서 나는 '작가주의'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무척이나 반가웠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직접 각본을 쓰고 이를 통해 상정한 주제 속으로 깊게 깊게 파고 내려가는 작가적 문제의식, 그리고 마치 장인처럼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영화를 빚는 감독. 나는 오랜만에 작가주의 감독을 만났다는 반가움과 그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의 다음 행보를 지켜보고자 한다.


이윤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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