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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Jun 27. 2016

사랑의 전복을 꾀하다

죽음의 관점에서 본 사랑 이야기, [또! 오해영]

나는 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대가 저녁마다 바다 너머로 내려가 지하 세계를 비추듯이, 그대 넘치게 풍요로운 성좌(태양)여!

내가 지금 찾아가려 하는 인간들이 일컫듯이, 나는 내려가야(몰락해야) 한다. 그대처럼.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니체는 흔히 가면을 벗기는 철학자라고 한다. 그만큼 위선과 거짓을 혐오했고, 그로부터 삶의 진실을 구원하고자 했던 철학자다. 그래서 니체를 이해할 때 핵심적인 개념이 되는 단어가 '내려감(몰락)'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태양은 높이 떠 세상을 비추고 그래서 고고하고 위대하지만, 자신을 뽐내는 저 하늘에만 계속 머물러서는 더 이상 고고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 아마도 군림하려는 그 자태에 질려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은 무엇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태양의 몰락은 지상의 양식을 음미하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자연의 태양은 자신의 몰락과 내려올 때를 알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어찌 보면 인간은, 특히 현대인은 자신의 자태를 뽐내기 위해 저 하늘 위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태양과도 같을지 모르겠다. 인간은 언제고 모두를 굽어보며 내리쬐어 그들 위에 언제까지나 군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외면된다. 몰락은 없지만, 더 이상 고고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 아무도 쳐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 흉물스러운 과에너지 덩어리가 되고 만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쪽팔림이야. ... 인간의 역사는 쪽팔림의 역사지.


작가 박해영은 드라마에서 '쪽팔림'을 유난히 강조한다. 등장하는 인물도 쪽팔림을 기준으로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쪽팔림을 감추려는 자와 쪽팔림을 감수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자.


쪽팔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쪽팔림을 피하고 싶어 할 것이다. 누군들 남들 앞에서 창피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쪽팔림을 피하려는 데만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낯선 경험에 도전해 보기도 주저할 것이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도 주저하게 된다. '그러다 차이면 어쩌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어쩌지?', '쪽팔리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머리 속에 자리잡기 시작하면, 이내 눈두덩이 불어나듯 커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장고 끝에 내리는 결정은 언제나 '그냥 가만있자'가 되고 만다. 그럼 성공이다. 적어도 쪽팔릴 일은 없으니.


온/오프라인의 시선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겐 특히 '쪽팔림'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사소한 일이라도 누군가의 재미가 된다면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전파되고 확산되어 곳곳에서 낄낄거리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시선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지금의 미디어 기술이란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무엇이라도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놓았고, 때문에 나의 모습이 누군가의 낄낄거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마음 한 켠에 두려움을 자라게 한다. 반대로 누군가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망 또한 과도하게 부채질된다. 결국 보여지는 모습을 만들어가는데 집착하고 힘주어 사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우리는. 그래서


아무도 몰락하지 않으려 하고 아무도 쪽팔림을 무릅쓰려 하지 않는다. 쪽팔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간. 그것이 현대인의 진짜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는 것은 지상의 과제가 되고 결과적으로 진짜 나의 모습은 감추고 방어해야 할, 꼭꼭 숨겨두어야 할 '잘못'같은 것이 돼버리고 만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지 못하고 쪽팔리지 않게 감정을 억압하고 제어해야만 하는, 그리고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결국은 '감정 불구' 상태에 이르게 된, '가면' 그 자체가 되고 만다. 결국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우리를 지배하는 유일한 감정은 '두려움'이 되고 만다.


인간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었다.


이렇게 두려움이라는 에너지로 자신을 감추는 게임에서 감정 불구의 상태로 공허함과 메마름에 죽어가는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듯이 나타난 인물이 오해영(서현진 役)이다.


바보... 감정 불구... 언젠가 나 때문에 울 거야. 울길 바래


드라마 내내 그녀는 우리가 그토록 이나 두려워하는 쪽팔림의 모든 경우를 감내하는 인물이다. 언제나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노출되어 있고 평가당하고 비교당하지만, 날아오는 상처의 화살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아낸다. 그러니까 기꺼이 쪽팔림과 몰락의 길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녀는 화살에 상처 투성이가 되지만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을 자아내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할 걸 그녀는 가질 수 있게 된다. 그토록 이나 치욕스러운 경험으로 그녀가 얻게 된 선물은


바로 두려움이 아닌 사랑이다.


재미있는 건 똑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오해영(전혜빈 役), 그러니까 주인공 오해영과는 다르게 모두에게 관심받고 화려하게 살아가는 이쁜 오해영이 등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쁜 오해영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고, 주인공 오해영을 움직이는 감정은 사랑이다.


두 오해영, 과연 누구의 인생이 더 부러울까?


상처는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그것이 상처가 가진 의미다. 그리고 상처를 통해 성숙하려면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할 줄 알아야 한다. 한 오해영은 상처를 응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쪽팔림을 무릅쓰고 도전한다면, 다른 오해영은 상처를 외면하고 마치 그런 상처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처럼 이쁜 '척', 웃는 '척', 사랑스러운 '척'을 한다. 하지만 그 '척'하는 가면 속에 그녀는 언제나 울고 있고 사랑받지 못할 두려움에 동공이 흔들린다. 자신을 연출하기 위한 긴장감은 항상 그녀를 힘들게 하고 그럴수록 진짜 자신을 내보이지 않기 위한 안간힘은 필사적이다.


그래서 결혼을 앞두고 도망을 선택한 그녀의 행동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 엄청난 두려움의 무게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필사적으로 만들어 놓은 가면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에게 진짜 모습을 들키고 만 한 여자의 절망감. 그만큼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고 애써 만든 가면이 곧 자기 자신이 되길 바랬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들키지 않으려 몸부림쳤던 진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끊임없이 쪽팔려하고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거부하고 가면을 쓴 사람의 안간힘이라니. 결국 그녀는 자신의 가면도 잃고 사랑도 잃어버린, 그래서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그 자신으로 다시 되돌아와 홀로 남겨져 버렸다.


어쩌면 이쁜 오해영의 안간힘이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는지...


하지만 주인공 오해영은 다르다. 그녀는 어떤 순간에도 쪽팔려서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척' 따윈 하지 않는다. 그녀는 두렵지만, 그래도 선택은 언제나 사랑이다. 사랑을 향해 돌진한다. 상처 투성이라고 하더라도. 때문에 사랑은 결국 그녀의 것이 된다. 두려움 때문에 벽을 치지도 않고 자존심을 위해 재지도 않고, 사랑에 자신을 아낌없이 던지기에, 그녀는 온전히 사랑 안에 있고 진짜 자신의 사랑을 한다. 상처받고 외면받아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자신의 것이다. 그리고 그녀처럼,


두려움 없이 사랑을 선택하는 인생, 그것이 진짜 인생이다.


인간의 감정은 단 두 가지로 수렴돼. 두려움 아니면 사랑. 하나는 가짜 하나는 진짜. 자네는 진짜를 알아버렸고, 그래서 사랑으로 아낌없이 돌아섰을 때 상황은 바뀌었던 거고.


작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왜 우리가 상처와 쪽팔림을 감수하고서라도 마음이 하는 데로 끝까지 가봐야 하는지. 왜 그렇게도 힘들고 아파도 피하지 말아야 하는지. 왜 두려움보다는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지. 작가는 그 이유를 '죽음'에서 찾는다.


죽는 순간에 득도한다는 말 들어봤어. 모든 사람은 죽는 순간에 분명히 알게 돼.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


사랑에 주저하는 것, 진짜로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 위험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것, 그래서 자신이 아닌 것, 척 하는 것, 안전한 길만을 선택하는 것... 그런 선택의 맨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누구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자신의 죽음. 아니 자신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바로 그것. 내 존재의 사라짐. 죽음.


인생에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그건 결국 죽는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그 사실을 비껴갈 수 없다. 그리고 더 무서운 사실은 그 죽음의 시점 또한 내가 결정할 수 없다. 우린 당장 오늘이라도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으며, 불치병에 걸릴 수도, 재수 없게 번개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우린 당장 죽지 않을 거라 당연히 믿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걱정하지만, 사실 그 굳건한 믿음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며 그 언젠가는 바로 오늘일 수도 내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살고 있다. 우리는 내일을 걱정하고 다음 주를 걱정하며 1년 뒤, 10년 뒤 심지어 100살에는 어떻게 살지 걱정한다. 물론 100살까지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00살까지 살 수도 있듯이 내일 죽을 수도 있는 것. 그것은 우리가, 내가 통제하고 선택할 수 없는 신의 영역에 속한 사건이다. 인간은 그 사건의 시점을 선택할 수 없다.


우리가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 두려움보단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 가면을 강요하는 타인의 시선보다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따라야 하는 이유... 그 모든 이유는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인생은 유한하며 짧기 때문이다.


오늘과 내일 내가 살아간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위험보다는 안전이 더 중요하고, 내 만족보다는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고, 사랑보다는 두려움 쪽으로 팔이 굽는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다. 계속해서 살아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하지만, 죽음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면 달라진다. 죽는 순간 바라본 인생에서 두려움이란 쓸데없는 감정이며, 정말로 중요한 건 사랑하는 무언가를 위해 나를 던질 때의 행복이며 오히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복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작가는 '두려움보다 사랑'이라는 말이 단지 교훈적인 명언으로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깨달음을 나누고 싶다는 일념으로 드라마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사라진다는 걸 인정하면, 엄한 데 힘주지 않게 되지.


죽더라도 누가 손만 잡아주면 겁나지 않지 않을까


우리의 생은 다만 시간이 끝난 지점에서 되돌아보고 있는 것뿐이다.... 진짜로 받아들이면 되게 편해져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해. 지금 이 상황에서 내 마음이 가장 원하는 게 뭘까. 상황을 바꾸려 애쓰지 말고 그냥 니 마음을 들여다봐. 니 마음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 드라마는 '죽음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게임 - 썸으로 대체되는 시대, 쪽팔림과 두려움이라는 게임의 룰에 갇혀 가면으로 자신을 덮어버린 인간들의 진짜 모습을 들추어내고,


그들의 마음 한가운데로 들어가 사랑의 전복을 꾀하는 드라마. 그리고 그 전복을 위한 무기가 되어주는 죽음이라는 시한폭탄.


주인공 박도경(에릭 役)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 정신과 의사에게 고백하는 대사에 이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모든 메시지가 집약되어 있다. 사랑이 사라진 시대, 사랑을 구원하려는 이 드라마의 원대한 도전에 나는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를 두려움과 가면에 가두어버린 현대인들이 그 사슬을 끊어내려는 용기를 내는데 이 드라마가 도끼와도 같은 역할을 해 주리라 기대해 본다.


한 번도 편하게 마음이란 걸 드러내 본 적 없어요.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항상 적당히

상대가 보이는 호의보다는 적게

상대가 보이는 적의보다는 세게

기준점은 항상 상대의 반응

한 번도 마음을 편하게 풀어헤쳐본 적 없어요


더 줄 수 있는 사랑을 주지 않았고

마음껏 줄 수 있었는데 안 줬고

그렇게 팍팍하게 군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자가 있다는 게

그게 제일 걸려요




주인공 오해영의 사랑은 위태롭지만 아름답다. 아니 오히려 위태롭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랑이다. 그녀의 사랑은 그래서 결국 조롱보다는 부러움의 대상이며, 우리가 쫓아야 할 진짜의 마음이다. 사랑만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그러하다. 위태롭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생. 니체가 말하듯 위험한 줄타기를 마다하지 않고 건너가기에 위대한 인생.


난 사랑에 그렇게 원없이 휘청거리는 니가 부러워.


- 오해영의 친구 희란의 말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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