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소설, [고산자]
*영화, 책 내용 관련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절대로 답이 있을 수 없는 우문(愚問)이지만, 살다 보면 자꾸 묻게 되는 필문(必問)이기도 하다. 정답(正答)은 없는 질문이지만, 각자만의 해답(解答)은 있어야만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당신은, 나는 해답이 있는가?
난고(김병연 혹은 김삿갓)에겐 시가 있고 그(김정호 혹은 고산자)에겐 지도가 있다. 난고는 일찍이 세상사 무상함을 깨달아 제도의 억압이 없는 바람결에 제 몸과 마음을 풀어놓았고, 그는 바람 속을 걸을 때에도 모두 풀어놓아선 안 되는 것이 있다 하여 한사코 그림 속에 천하를 옮겨놓으려 했다 할 것이나, 난고나 그나, 살고 죽는 꿈이 평생 풍우설상(風雨雪霜)에 있었을진대, 시작하고 끝나는 길이 뭐 다르다고 할 것인가.
- 박범신, [고산자] 중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 그의 지도는 모르는 사람 없이 유명하지만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단다. 사실 그의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조선시대 후기에 그렸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정확한 척도와 세세한 묘사가, 지도에 대해 문외한인 나조차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 지도를 그리기 위한 아무런 도구가 없었던 시절이어서 오로지 눈대중과 두 발에 의존해서만 이 지도를 그려냈다고 하니, 놀랍기도 놀랍지만 이런 정확한 지도를 그려내기 위해 평생을 바쳤을 시간과 노력이 감히 가늠하지 못할 정도다.(평생을 바치지 않고서야 이 정도를 그려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런 질문에 맞닦드리게 된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걸 그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을까. 무엇이 그를, 그의 인생을 지도로 안내한 것일까?
작가 박범신의 [고산자]는 이 질문으로 시작된 소설이라 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소설이지만, 김정호의 일생에 대한 추측성 역사소설 정도가 되겠지만, 이 소설은 또한 존재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출판사에서도 본 작품과 [촐라체], [은교]를 묶어 '갈망' 시리즈라고 부르기도 한다. 뭐, 마케팅의 일환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생이란게 갈망이라는 동인으로 움직여진다는 데 나는 동의한다. 중요한 건 무엇에 대한 갈망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누구나 자신을 살게끔 하는 존재의 이유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의식적으로 판단한 것이든, 환경에서 주어진 것이든, 그 두 가지 모두의 문제이겠지만 여하튼, 누구든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 혹은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무엇.
왜 태어났는지는,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로 가는지는 당최 알 수가 없겠지만, 나를 살게 하는 것만은 있어야 한다. 이미 나는 살아있으므로, 또 앞으로 살아가야 하므로. 그렇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지옥이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게 없어서 지금의 내 삶이, 많은 현대인들의 삶이 지옥과 같은 것이 아닐까.
어쨌든, 모두들 존재의 이유라고 할 법한 무언가를 가져야만, 혹은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것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일 수도 있고, 언제 도망갈지 몰라 초조하게 붙잡고 있는 연인일 수도 있고, 먼 훗날에 내 손에 들어올 집 한 채일 수도, 부하들을 호령할 수 있는 직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개는 그런, 지극히 생활적인 것들이겠지만 조선시대 후기 그 혼란스럽고 불투명한 세상에서 가난한 중인으로 태어나 부모 잃고 살아가는 고아에겐 뭔가 더 특별한 것이 필요했으리라. 그것이 아무도 몰라주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낙서 같은 그림일지라도.
그렇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당신에게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면 이미 그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을까. 흠... 머리가 복잡해지므로 일단 패스.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존재의 이유란 게 무엇이 되었든, 인간이란 한 평생 쫓는 무엇, 혹은 무엇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노력과 투지가 크면 큰 만큼, 오래되면 오래된 만큼 얻어지는 것이 있으니, 바로 세상의 이치에 대한 앎이다. 세상이란 본래 다 알 수가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우물을 뚫어지게 파다 보면 지하수만 만나는 게 아니라 땅 속에 묻혀있는 수맥의 흐름도 알 수 있게 된다. 무슨 소린가 하면, 한 가지 분야를 뚫어지게 파다 보면 그 분야밖에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도 있겠으나, 세상의 이치란 게 하나가 전체로 통하는 신기한 구석이 있어 한 분야의 이치를 알게 되면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학문으로 치자면 철학인 것이고, 예술로 치자면 영감 같은 것이 된다. 마치 한 악기를 주야장천 연습하다 보면, 음악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것처럼.
흐르는 길에서 보는 모든 것은 그가 흐르듯 함께 흘렀고, 함께 흐르는 느낌으로 보는 모든 것은 서로 경계가 없이 한통속이 되었다. 흐르면서 보는 삼라만상은 기실 얼마나 꽉 찬 세계인가.
- 박범신, [고산자] 중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변증법의 명제를 지도 그리기 하나만으로 깨달을 수도 있다. 그것이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가지든 안 가지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세계의 이치라는 게 중요하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을 때의 희열은 뭐랄까, 어떤 맛있는 음식보다도, 어떤 아름다운 보석보다도, 어떤 감각적 즐거움보다도 더 짜릿하지 않을까?
세상을 관통해서 보는 자신만의 시각을 가진다는 것. 이 보다 더 짜릿한 살아가는 이유, 이보다 더 가슴 벅찬 존재의 확인이 또 있을까.
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들, 과학자들의 삶은 그 자체로 부럽다. 아인슈타인이 발견해 낸 우주, 마르크스가 해석해낸 사회, 우디 앨런이 재현해 낸 인생, 카프카가 표현한 인간... 대가들이 발견하고 해석하고 재현하고 표현한 세계를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벅찬데, 그걸 만들어낸 사람들은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는가.
그렇다면, 다시 묻게 된다. 나는, 내 존재는 어떻게 확인해야 하는가? 남의 존재를 구경하는 대리체험 말고 말이다.
우리에겐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 잘 먹고 잘 살다가 가야겠지만, 당장 때울 끼니가 없어 구걸을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만으로는 인생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거창할지 모르지만,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불만족은 존재의 이유가 분명치 않은 데서 온다. 그러니 그 공복감을 견디지 못하고 존재를 확인해줄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쇼핑, 권력 같은 것들...
이쯤에서 다시 소설로 돌아와, 김정호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집착했던 지도는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길이었고, 지도를 그리는 창작과정은 그의 존재 이유와 같았다. 그러므로 지도에 대한 그의 '갈망'은 그를 살아있게 하는 무엇이었고, 그의 인생이 되었다. 작가는 유려한 문체로 그의 존재 이유를, 그의 갈망의 인생을 참 그럴듯하게, 치열하게 잘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 [고산자]는 고산자의 작품 '대동여지도'만큼이나 치밀하고 잘 짜여진 예술작품으로 그 감동과 위용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일이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선뜻 대답하기 힘들다면, 우린 우리의 인생 전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자기만의 답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