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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Feb 01. 2017

마음의 혁명을 꿈꾸는 영화

켄 로치의 두 번째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일본의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가 [남쪽으로 튀어]라는 소설에서 한 말이다. 나는 이 말 한마디에 매료되어 한동안 그의 소설과 에세이를 탐닉하곤 했었다. 궁금했었다. 대학시절을 소위 운동권으로 보냈던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왜 좌파나 우파의 사상이 아닌 마음을 얘기했을까.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에서는 공포 정치가 횡횡하고 북한에서는 3대째 세습 독재가 이어지고, 쿠바를 지탱시키던 카스트로는 떠났으며 중국은 시장경제 도입에 열을 올리는 지금의 시대. 미국에서는 트럼프 같은 극우 선동가가 과반수의 지지를 받고 자국의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타민족과 외국인 거주자를 향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유럽은 민주주의의 발현지라는 명예가 무색하다. 무장하는 일본과 테러에 목숨을 거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경제 성장은 멈춰버렸지만 부자는 여전히 더 많은 돈을 축적하고, 실업은 증가하되 복지는 삭감되며, 기술은 고도화되고 시스템은 견고해졌지만 인간은 더욱 무기력해지고 왜소해지는 세상. 대안으로는 오로지 시장 경쟁력만을 거론하는 자본가와 정치가들. 폭력과 적개심이 이데올로기 아닌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 욕심과 분노의 부정적 감정이 삶의 유일한 동인이 되어 버린 괴물 같은 사회. 그런 괴물 같은 사회를 살아내기 위해 괴물이 되어가는 인간들. 괴물과 괴물이 서로를 소외시키고 격리하여 결국 인간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린 인간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지금의 시대, 니체의 경고는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괴물이 되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난을 쏟아내지만, 정작 아무도 괴물이 되어가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우리는 위로받아야 하지만, 정작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손쉬운 무언가를 찾아 분노를 쏟아낸다. 결국 그렇게 우리는 그들을 닮아간다.


얼마 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탄 메릴 스트립의 수상소감은 그래서 조용히 곱씹어볼 만하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공로상 수상소감을 하는 메릴 스트립


무례함은 무례함을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낳죠.


괴물을 손가락질하고 뒤에서 비난하는 건 쉽다. 괴물을 비난하면서 나 자신은 괴물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가져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괴물을 비난하는 그 분노와 비난의 마음으로 과연 무엇을 이뤄낼 수 있을까. 분노와 비난은 과연 사회를 바꿔낼 수 있을까. 괴물이 되어버린 이 사회에서 폭력과 위협에 맨 몸으로 노출되어 있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는 어떤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을까? 괴물을 향한 비난은 과연 우리가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분노는 분노를 낳을 뿐,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런 주제를 너무도 잘 다루고 있는 영화 [In a Better World]


If you hit him, then he hits you,
and it never ends.


한 때, 우리는 그런 분노의 마음이 사회를 바꿔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적이 있다. 실제로, 괴물을 향한 거대한 분노의 물결은 좀 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를 해 온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 거대한 분노의 물결을 '혁명'이라 칭하고 그것을 칭송하고 무작정 쫓기도 했다. 괴물이 되어가는 사회를 멈추고, 다시 한번 분노의 물결이 일어 그 모든 부조리를 일소하기를 기대해 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시장과 권력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 무력하게 스러져 갔다. 그리고 그 사이 인간은 괴물을 비난할지언정 서로를 돌보는 일은 잊어버린 채, 누군가는 그 분노의 물결을 다시 한번 만들어주길 기대하며 조용히 세상을 관망하고 있다. 아니 분노를 키보드에 쏟아내며 스스로 자족한 채 다시 일터로 향한다.


이제 인간을 위협하는 건 단지 시스템만이 아니다. 거대 권력과 시장만도 아니다. 인간을 위협하는 가장 큰 괴물은 '외로움'이 되었다. 괴물과 맞서고 있지만 혼자 싸워야만 하는 고립감. 타인의 싸움은 타인의 싸움일 뿐이 되어버린 모든 것의 타자화. 스스로의 싸움은 스스로가 감당해야 하는, 혁명도 셀프가 되어버린 거대한 단절의 사회.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하는 건 저기 저 멀리 호위 호식하며 살고 있는 일부의 권력층만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격리시키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과도 싸워야만 한다. 그리고 스스로 외쳐야만 한다. 난 아직 여기 살아있다고.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 나의 싸움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외쳐야 한다.


'난 살아있어'라고 스스로 외치는 인디계의 걸작 다큐영화 [나는 중식이다]


여기 사람이 있어. 무너진 건물 당신 발 밑에.


하지만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사회. 우리가 잃어버린 건 단지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만이, 복지에 대한 정당한 보상만이, 생계를 위한 정당한 일자리만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 잃어버린 건 서로에 대한 관심,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는 따뜻한 마음이다.


따뜻함을 잃어버린 사회. 한 사람의 고객으로, 한 사람의 노동자로, 한 사람의 사용자로, 보험증서의 번호로, 카드 영수증의 사인으로, 화면 속의 한 점으로 존재해야 하는 사회. 그래서 끝내 일상의 어디에서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나로서 살 수 없는 사회. 그렇게 서로를 서로 소외시키는 이 사회는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힘든 괴물 같은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우린 그런 괴물 같은 사회에서 괴물을 비난하지만 서로에게는 괴물이 되어 괴물이 된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모두가 각자 고립된 괴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혁명이란 거대한 분노의 물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자각하는 일이며 그런 자각을 통해 스스로를, 그리고 내 주변을, 위협에 노출된 이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따뜻하게 바라보고 손 내밀 수 있는,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물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혁명의 물결이 필요하다.


켄 로치는 언제나 자본과 권력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계급투쟁을 독려하는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이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정치성의 맥락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영화가 유독 그 전 영화와 다른 점을 나는 바로 '마음의 혁명'에서 찾는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손 내밀 수 있는, 고립된 각자의 싸움을 함께하는 싸움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우리가 언젠가 간직하고 있었던 하지만 퇴화되어 가고 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


저기 저 위에서 군림하는 괴물보다 더 혹독하게 우리를 패배로 이끄는 각자의 마음속에 내재된 괴물. 우리가 싸워야 할, 먼저 넘어야 할 벽은 바로 우리 자신이 쌓아놓은 마음의 벽이 아닐까.


그리고 켄 로치는 이번 영화를 통해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바로 그 마음의 벽을 고발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마음의 혁명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켄 로치의 영화 중 특별히 이번 영화가 가지는 힘, 그래서 유독 우리의 영혼을 울리게 하는 동력이 아닐까.


켄 로치가 말하는 마음의 혁명은 영화 곳곳의 이야기에서, 대사에서 소소하게 찾아볼 수 있다.


케이티가 처한 억울한 상황에 댄이 관심을 가지면서 둘은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단지 길을 몰라서 몇 분 늦은 것 뿐이요"


힘겨운 케이티를 견디게 하는 건 낯선 환경에서 처음 만난 댄의 위로다. "네 잘못이 아니야.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우리한테는 잠시 기댈 바람이 필요할 뿐이야"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장면. 나는 이 장면이 영화에서 켄 로치가 담고자 했던 메시지를 가장 압축해서 보여주는 조용한 하이라이트가 생각한다. 굳게 닫혀진 문, 아마도 그것은 마음의 문이기도 하리라.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패배감으로 스스로 걸어 잠근 문. 그 문에 난 조그만 틈새로 끈질기게 집 안을 응시하며 말을 건네는 한 소녀. 대답하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는 소녀의 부름. 걸어 잠근 문을 다시 한번 걸어 잠그려 하는 댄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건 소녀의 한 마디다.


모든 것을 포기한 댄을 찾아가는 케이티의 딸


우릴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




항고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려는 마음의 혁명은 혼자서 이루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거울을 쳐다보며 자신의 얼굴에 드리운 패배감을 씻어내는 장면은 켄 로치가 우리들에게 남겨놓은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희망은 기댈 바람이 되어주고자 했던 한 소녀의, 한 이웃의 작지만 용기 있는, 따뜻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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