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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Nov 26. 2017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일

루시드 폴, [누군가를 위한]

2015년 겨울, 그러니까 그의 7집 [누군가를 위한,] 발매 즈음. 제주에 정착하고 자신의 땅에서 귤농사를 짓는 루시드폴을 보며, 너무나도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제주에 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키우던 시절이었는데, 그 당시는 부동산 경기부터 유입 인구, 시장 상황 등등 여러 가지 면에서 제주가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던 시절이라 일찍 정착한 사람들이 누렸을 혜택이 마냥 부러울 때였다. 그리고 그 부러움 속에는 대개의 속 좁은 이가 그렇듯, 질투와 시기의 마음이 있었다.  '일찍 내려가서 쉽게 쉽게 자리 잘 잡았겠구만' 하는 식의.


7집 당시, 홈쇼핑에 출연한 루시드 폴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런 속 좁은 비아냥이란 아무것도 자신의 손으로 해보지 않은, 해보려 하지 않은 비겁한 자의 변명이자 자기 위안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비겁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가만히 앉아서 성공한 자의 결과만을 부러워하는.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걸어왔을 험난했을 길 따위는 전혀 알지도 짐작하지도 못한 채.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알게 되었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의 어려움을. 그건 단지, '힘들다'라고 말하기에는 그 이상의, 심연의 두려움 같은 게 도사리고 있는 그런 어려움을. 아마 그도 똑같은 심정이었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아무런 표지판도 없는, 심지어 길조차 나 있지 않은 곳을 더듬거리며 걸어갈 때의 그 심정. 한발 앞을 뗄 때마다 안도하면서도 또다시 두려워지는, 주변에 작은 기척이라도 날 때면 번개라도 치듯 놀란 가슴이 되는 그 연약해진 마음을.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현실적인 문제부터 눈 앞의 결혼까지, 눈을 꽁꽁 가린 채 서로의 손만 잡고 걸어가야 하는 기분이었다. 그 해 나는 단 한 번의 공연도 할 수 없었다.


- 루시드 폴, [모든 삶은, 작고 크다]


우리 또한 그랬다. 두려웠지만 간절했고 그래서 저질렀지만 해결되는 일은 없고 돌이킬 수 없다는 불안은 더해만 갔다. 그즈음이었다. 이미 귤 농사와 음악 활동을 훌륭하게 병행하고 있는 루시드폴의 모습이 그토록 이나 부러웠던 때가. 그렇게나 부럽고 질투가 난 나머지, 그가 내놓은 결과물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나는 미쳐 생각지 못했다. 오직 그가 지금 가진 결과만을 놓고 다 잡은 생선 앞의 고양이나 된 듯, 침을 흘리며 바라보았다. 어리석고 탐욕스러웠다. 그때의 나는.


그러다, 나 또한 어찌어찌 제주로 오게 되었고 어느 정도 미래의 윤곽이 그려지고 있는 요즘(아직도 두려움과 불안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의 새로운 앨범과 글을 만났다. 그의 음악을 먼저 접했을 때는, 또 부러운 마음이 앞섰다. ‘아, 그는 이렇게 여유롭고 따뜻한 사람이 되었구나’, ‘이렇게 평화롭게 세상을 바라보는구나’ 하는. 나는 아직도 이렇게나 불안하고 걱정스러운데. 하지만 전보다는 그래도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의 음악을 들으며 그에게서 위로와 평온을 찾았다. 실제로, 그의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고,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그를 통해 듣는 제주는 적어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제주보다는 더 아름답고 평온했다.


8집 앨범이자 에세이집, [모든 삶은, 작고 크다]


하지만, 몇 주 뒤, 그의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한편으론 여전히 따뜻하고 평온했지만, 한편으론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아, 그도 그렇게나 험한 길을 그렇게 힘겹고 무섭게 걸어왔구나.’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경외의 마음도 느끼게 되었다. ‘아, 그는 강한 사람이구나. 그 모든 불안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길을 가고 있구나.’


그래, 자신의 인생을 산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누구에게든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결과물만을 보고 '좋겠네'라는 한 마디로 그가 겪었을 모든 어려움과 고뇌와 불안과 두려움의 과정을 쉽게 생략해버린다. 그건 그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그 누군가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그 결과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는,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일과도 같다. 그가 만들었다는 귤 몇 박스와 앨범 한 장, 책 한 권. 요즘 어디에서나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것들. 그렇게 TV에서 SNS에서 보는 ‘그런 것들’ 중 하나로 보고 지나치게 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본 ‘그런 것들’에는 그것들에 담겨있었을 그의 인생과 그가 만든 세계, 그가 키워낸 생명과 자연의 그 모든 의미는 이미 사라진 채이다. 나는 그것들을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한 셈이다.


그의 에세이집, [모든 삶은, 작고 크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으며, 나는 그가 걸어온 길과 그가 그의 결과물에 담았을 그의 세계, 그리고 그와 함께 그를 도왔던 그 곁의 사람들과 자연과 생명의 그 모든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는, 그를 쉽게 질투했던 나의 속좁음과 빨리 결과물을 얻고 싶어 하는 나의 성급함이 부끄러웠으며, 그가 걸어오고 일궈낸 것들에 대한 놀라움과 존경스러움, 그리고 자기 주변의 모든 우주와 함께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그의 삶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때 문득, 나는 나를 제주로 이끌게 만들었던 한 물음이 다시 떠올랐다.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 물음은 그 당시 나를 짓눌렀다.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지만 맞서지 못했던, 아니 맞서기를 두려워했던 그 물음. 그 물음은 아무도 없는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한 시민 운동가의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숲으로 갔다. 온전히 내 뜻에 따라 살고, 삶의 본질적인 면에 부딪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삶에서 배워야만 하는 것을 내가 배울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또 죽음을 맞게 됐을 때 지금껏 제대로 살지 않았다고 후회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나는 ‘삶이 아닌 삶’이 아닌, ‘삶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나는 그 질문에 맞서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떠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나는 어렴풋이 깨우쳐 가고 있었다.


그의 책을 읽으며,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과정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지, 나는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삶을 살고 싶다는 절실함. 그리고 그 절실함은 그 모든 두려움의 심연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절실함이란 바로 ‘나의 것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바램이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한, 그렇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삶 그 자체로서의 바램. 나와 삶이 합치되었으면 하는 바램. 그것은 하나의 바램이자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삶이 곧 나이고, 내 존재가 곧 삶인.


그도 그랬을 것이다. 그 작은 귤 하나라도, 앨범 한 장이라도, 책 한 권이라도 내가 원하는 데로, 나를 온전히 담아,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3년 전, 그 시끌벅적한 음악 같던 농사일을 하던 때, 나는 필사적으로 음악을 만들고 동화를 썼지 싶다. 음악을 시작한 이후, 그렇게 절실하게 무언가를 썼던 적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 '절실함'이란 무언가를 지켜내려는 본능이었지 싶다. 그 '무언가'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알게 되었다. 아무리 작고, 아무리 먼 밭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해도, 내가 바라는 대로 짓는 농사보다 더 값질 수는 없다는 것을.


그 어떤 스튜디오에서도 담을 수 없는, 소리가 앨범 속에 차곡차곡 담기고 있다. 이곳에서 소리를 모으는 지금 이 순간이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 루시드 폴, [모든 삶은, 작고 크다]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일은, 고달프고 힘겹고 외로운 일이지만 숭고하고 위대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나만의 ‘세계’는 아름답다.


삶의 본질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만의 세계를 만드는 일. 내 눈으로, 귀로, 몸으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그 모든 체험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그리고 또 ‘나’라는 하나의 우주 안에 그 체험들이 버무려져 세상 밖으로 토해 나오면 그것이 곧 나의,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 속에서 또 다른 세계와 조우하고 함께 하면서 다시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의 오두막 집에서, 루시드 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더 많은 길을 걸어보고 싶다. 더 다양하고 예기치 못한 길로 나를 안내해줄 그런 길을 많이 걷고 싶다. 익숙한 아름다움의 가짓수만 늘리기보다, “어?” 하며 갸우뚱할지언정 가보지 못한 길을 걸어보고 만들어내고 싶다. 그러다 보면 내 품의 아름다움도 조금은 더 넓어질 테고,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도 늘어날 테지. 그리고 새삼 또 생각한다. 이 세상에 단 하나의 길만 있을 수 없듯, 모두가 같은 길을 걷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모두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하나의 노래도 모두에게 다른 노래로 남게 된다는 것을.


- 루시드 폴, [모든 삶은, 작고 크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걸어가는 길은, 그가 만들어 온 세계는, 그라는 사람은. 그의 음악과 글을 통해 나는 또 한 번 삶의 초심을 되새긴다. 그리고 애초에 걸으려고 했던 나의 길을 떠올린다. 그동안 흔들리고 불안하게 걸어왔던 그 길 위에서, 다시 한번 나를 다독이며 이 길을 가는 의미를 되새긴다. 약해져 있는 나에게 한껏 힘을 북돋아 주고 다시 찾은 나침반이 되어주는 그의 음악과 책, 그리고 그의 존재가 참 고맙다. 나도 그처럼, 하지만 그와는 다를 나만의 길을 가고 싶다. 책을 다 덮고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곧 자신의 세계가 된다.


루시드 폴이 내게 준 작지만, 큰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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