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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Dec 08. 2017

메이크보다 놀라운 리메이크

유재하 30주기 추모 앨범, [우리 이대로 영원히]

유재하 30주기 추모 앨범, [우리 이대로 영원히]


대개 이런 앨범은 프로듀싱의 싸움이다. 특정 음악인을 기리기 위한 컨트리뷰트 앨범이나 리메이크로만 꾸며진 앨범 같은.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노래를 나름의 표현대로 나름의 느낌대로 재해석하여 다시 만들어내야 하는 경우다. 이런 경우, 자칫하면 원곡을 너무 훼손하여 낯설게 느껴지거나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고, 혹은 원곡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그냥 원곡이 더 듣고 싶게 돼버린다거나.


이건 인간이 가진 이중성 때문이기도 한데, 인간은 새롭고 신기한 것에 항상 끌리게 마련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익숙한 것에 머물고 싶어 하는 향수 또한 가지고 있다. 새롭지만 너무 낯설지 앟은 것,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루하지는 않은 것. 마치 심플한 화려함이나 검은 화이트 같은 걸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이런 어려운 과제에 놓인 상황인 것이다. 리메이크란. 그렇기 때문에 사실, '리메이크'라는 말에는 이런 억울함이 묻어있다. 그건 리메이크라기보다는 리크리에이에 가깝다. 어쩌면 내 마음대로 그냥 만들어내는 것보다 어려울 수도. 새하얀 도화지에 자신의 스타일대로 풍경을 그려나가는 일도 어렵겠지만, 누군가 그려놓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그림에 덧칠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끔찍하지 않은가? 그것도 대가의 그림에 말이다. 망칠까 봐 아니면 본래 작품보다 못할까 봐 또는 뭐가 달라진 지 아무도 모를까 봐 등등의 각기 다른 여러가지 종류의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이다.


그런 두려운 작업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유재하의 컨트리뷰트 앨범에 참여한다는 일은. 물론 영광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부담도 큰 것이리라. 특히나 유재하는 수많은 리메이크 버전이 이미 존재하는 리메이크의 단골손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유재하의 컨트리뷰트 앨범은 꽤 성공적이다. 특히, 리메이크를 리크리에이션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는 더더구나 그렇다. 우선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음악의 세련미에서 그렇다. 혹자는 너무 훼손한 것이 아니냐, 유재하에 랩이 웬 말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힙합이든 록이든 어쨌든 들어서 어색하지 않고 좋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리메이크에서 가장 어려운 바로 그 점, 본래의 음악이 가지는 감성과 멜로디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바로 그 지점을 잘도 찾아내고 있다는 점. 그래서 유재하의 음악인데도 불구하고 유재하의 원곡이 듣고 싶어 지기보다는 이 앨범을 계속 듣고 싶게 만드는 고유한 매력 발산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앨범 트랙리스트 & 참여 음악가


그런 점에서 특히나 성공적이고 듣기에 '좋은' 곡은 이진아의 '그대 내 품에'와 지소울의 '텅 빈 오늘 밤', 그리고 조원선의 '가리워진 길'이다. 이진아의 '그대 내 품에'는 두말할 필요 없이 이진아 표의 재지한 편곡이라는 점, 그리고 자신의 편곡에 역시나 잘 어울릴 그녀의 연약하지만 알맹이 있는 목소리의 음색. 완전히 다시 탄생한 노래라는 측면에서 아마도, 유재하가 살아있어 듣게 되어도 박수를 쳐줄만한 재탄생이 아닐까. 유재하 원곡의 '그대 내 품에'가 서정적인 저녁놀의 따뜻한 풍경이라면, 이진아의 '그대 내 품에'는 소녀가 무지개 위에서 잠드는 판타지한 풍경이랄까. 이진아의 음악은 언제나 진아스러운 영롱함이 있고, 이번 리메이크에서도 그런 그녀의 재주는 빛나게 발휘되고 있다.


올해 발매되었던 이진아의 앨범, [Random]


편곡 중에 가장 먼저 들려온 곡이 '그대 내 품에'였다면, 보컬의 독보적인 스타일로는 역시 지소울의 '텅 빈 오늘 밤'이다. 어찌 보면 거의 새로운 작곡이라고 할 정도의 이 노래는 리메이크를 듣는 재미를 극대화해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텅 빈 오늘 밤'이 가지고 있는 쓸쓸하고 건조한 감성은 그대로 살아있다. 일렉트릭 사운드를 활용해서 그런지, 도시의 쓸쓸하고 공허한 밤이라는 느낌이 그의 보컬을 통해 물씬 묻어 나온다.


2015년 발매되었던 지소울의 데뷔 앨범, [Coming Home]


그리고 또 한 명의 독보적 존재감의 보컬, 조원선의 '가리워진 길'. '가리워진 길'은 아마도 유재하의 노래 중 가장 많이 리메이크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여러 가지 버전이 떠오르는데(최근엔 미생 OST에서 볼빨간 사춘기의 리메이크도 있다.), 그럼에도 조원선은 자신만의 존재감을 이 곡에서 또 한 번 뽐낸다. 보컬의 색깔이 워낙 분명해서인지, 편곡은 피아노와 드럼, 트럼펫만으로 최소화되어 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트럼펫과 그녀의 보컬이 듀엣으로 노래하는 곡이라 할 수 있다. 스탠다드한 재즈풍의 낮게 드리우는 피아노와 드럼의 흐름 속에서 조용히 읊조리그녀의 보컬이 떨리듯 울리고, 그 울림의 사이사이마다 트럼펫이 한번 더 노래하며 그리움의 정서를 노래한다. 여러 가지 장치와 특별한 편곡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나 다르고 새롭게 들리는 건 아마도 그녀가 가지는 보컬의 음색과 아우라 때문이리라. 특히나 '가리워진 길'은 장조의 밝은 느낌을 살려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곡에서는 좀 더 차분하고 절제된, 약간 쓸쓸하기도 한 느낌을 살려 지금까지의 '가리워진 길'과는 다른 곡으로 다가오는, 조원선의 노래이다.


2009년에 발매되었던 조원선의 솔로 데뷔 앨범, [Swallow]


볼빨간 사춘기, '가리워진 길' from 미생 OST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만 더해 보자면, '사랑하기 때문에'의 편곡이다. 가장 유명한 그의 노래지만, 어찌 보면 느린 진행과 너무도 익숙한 멜로디 때문에 자칫하면 지루함을 주는 곡이기도 하다. 그래서 훼손해서는 안될 것 같은 강박은 지루함을 반복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론 너무 많이 변주할 경우에는 곡 자체가 주는 애틋한 감성을 모두 날려버릴 수도 있다. 이번 앨범에 수지가 부른 '사랑하기 때문에'는 그 지루함과 왜곡사이의 줄타기를 절묘하게 이루면서도, 이 곡이 주는 아련하고 간절한 감성을 세련되게 잘 살리고 있다. 특히 현악과 신서사이저의 적당한 배합으로 이루어진 편곡은 클래시컬함과 트렌디함을 동시에 연출하면서 현악이 주는 포근함과 전자음이 주는 설레임도 같이 담았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 편안하게 다가오는 또 하나의 '사랑하기 때문에'가 완성되었다. 편곡을 맡은 심은진 작곡가에게 경탄을!


수지, '사랑하기 때문에' MV


요즘같이 쏟아져 나오는 단발성 싱글 홍수 속에서, 이런 앨범이 주는 신선함은 크다. 유재하를 이렇게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내로라하는 프로듀서와 보컬, 래퍼가 만나 이렇게 흥미롭게 고전을 재해석해 내는 창작의 놀라움을 만끽하는 일은 무엇보다 즐겁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자리를 마련해 준 유재하라는 마르지 않는 샘에게도 경탄의 몫은 돌아가야 하리라.


유재하가 남기고 간 단 하나의 유작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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