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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Dec 30. 2017

교육이라는 굴레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 피터 위어, [죽은 시인의 사회]

병든 대한민국의 교육은 병들었다. 병든 교육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더 이상 성숙하지 못한 채 병든 사회에 진입한다. 그리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병든 교육을 다시 반복한다. 무서운 사회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100여 년 전, 급속도로 산업화되던 영미권 사회의 교육도 그러했다. 태생으로 계급이 판가름 나던 봉건적 전통이 붕괴된 것은 좋았으나, 계급의 이동이 노력의 여하에 따라 성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기회의 평등이라는 명분 하에 계급 상승을 위한 탐욕을 부추겼고, 소위 '성공'이라는 미명 하에 High Society에 진입하기 위한 부모들의 강박을 자극했다. 희생은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고, 그래서 계급의 상승과 유지는 성취되었지만 인간성은 상실되었다. 교육은 시험을 위한 대비에 불과하게 되었고, 그렇게 길러진 인간은 지식을 사유 없이 암기하여 저장하는 기계가 되어갔다. 그 과정에서 심리적 억압기제라는 오류는 불가피했고, 가끔 오류가 심각한 수준에 다다를 때도 있었지만, 오류는 오류일 뿐 대부분의 생산 공정은 순조로웠으며 재생산도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성장한 인간은, 성장했다기보다는 다스려졌으므로 어른이라기보다는 습득된 지식체계에 기대어 외부의 정보를 계산하는 여전히 수동적인 아이에 불과했다. 그들은 스스로 사유할 줄 몰랐고, 고장 난 감성으로 인하여 만족감은 물질적, 감각적 자극에서만 찾았다. 그들은 물질과 감각과 함께 행복했으나, 인생의 의미란 것을 찾을 줄 몰랐다. 그건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쓸데없고 비현실적인 고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인간은 밥 없이도 살 수 없지만, 의미 없이도 살 수 없다. 밥은 육체적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의미는 영혼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다. 밥이 없으면 육체는 죽음에 이르지만, 의미가 없으면 영혼이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그렇게 길러진 아이들은 의미의 필요성을 몰랐으며, 그래서 의미를 찾을 줄도 몰랐고 찾고자 해도 어떻게 해야 찾아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은 계속 허기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 허기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 몰랐으므로 그것을 막연히 물질적, 감각적 허기와 혼동했다. 그리곤 그것으로 허기를 채우고자 했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았다. 때문에 허기는 계속된다. 다시 물질과 감각으로 채운다. 허기는 더욱 깊어진다. 영혼에게 지옥과 같은 이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악순환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안정된 재생산 시스템이 바로 이 시대 '교육'이다.



심리적 억압이라는 오류를 견디지 못하고 고장이 나거나 폭발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다행이라 하겠다. 그들은 오류를 '오류'로서 깨닫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는 셈이다. 안타깝게도 작동을 멈추는 경우도 있다.(소설과 영화 모두, 죽음이 등장한다. 그저 드라마 전개를 위한 장치만은 아니리라.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죽어왔고 죽고 있다.) 하지만, 고장과 폭발을 겪는 경우에는 휴지기를 거치게 되고, 휴지기는 영혼에  힘을 길러주어 스스 오류를 진단해 내고 치유에 나서게 한다. 그리곤,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와 같은 놀라운 작품을 써내는 대문호가 되기도 한다.(두 소설은 모두 헤세의 자전적 이야기다) 혹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 같은 진정한 교육자가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다. 이 모든, 구 나는 부조리의 교육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저항하고 스스로 자라나 자신의 존재를 만개하는 인간이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은.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부조리를 되풀이하는 이 지긋지긋한 대한민국의 교육환경 내에서도 그렇게 자신을 찾아내고야 마는 인간들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역사는 또한 그렇게도 반복되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헤르만 헤세 (1877~1962)


아무도 학교와 아버지, 몇몇 선생님들의 탐욕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소년의 영혼을 무참히 짓밟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왜 한스는 예민한 소년기에 밤늦도록 공부에 매달려야만 했을까? 무엇이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았는가? 왜 낚시질과 산책을 못하게 했는가? 왜 그에게 하찮은 명예심과 공허한 이상을 심어 주었는가? 어째서 시험이 끝난 뒤의 휴식을 방해했는가? 마침내 지칠 대로 지친 노새는 길가에 쓰러지고 말았다.


-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키팅 선생님 in [죽은 시인의 사회]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휘트먼의 시를 인용하자면,


오, 나여! 오, 생명이여!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아름다움을 어디에서 찾을까?

오, 나여! 오, 생명이여!


대답은, 네가 여기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이 계속되고,

네가 시 한 편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이 계속되고,

네가 시 한 편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

여러분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 피터 위어, [죽은 시인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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