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이런 시대에 낙관론자가 된다는 것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도대체 인간의, 사회의 어떤 점이 이 세계를, 미래를 낙관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인지 누구든 나에게 명쾌하게 말해줄 수 있다면, 나 또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낙관주의자가 되리라. 낙관한다는 것은 차라리 살을 도려내는 아픔과 뼈를 깎아내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아는데서부터 출발하는 절박함의 문제이며, 때문에 그것은 낙관이 아닌 의지의 문제이다. 따라서 그런 의지란 것은, 더 이상 어쩌지도 못할 패배감과 끝없이 추락하는 좌절감과 함께하는 비관주의에서 비로소 피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차라리 역설적이게도, 인간에게 가장 낙관적인 전망일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렇고, 커트 보니것이 그러하며, 오쿠다 히데오도, 박민규도 그러하다. 인간과 세계를 같이 아파하고 인류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함부로 낙관적일 수 없다. 차라리 그들은, 세계를 비관하고 인간을 고발하는 날 선 인내만이 어쩌면 최선의 낙관일 수 있다는 그런 낙관을, 비관 속에 감추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 그들을 나는 '비관적 낙관주의자'라 부른다.
로맹 가리는 아마도, 비관밖에 할 수 없었을 끔찍한 20세기에, 그런 비관적 낙관주의의 포문을 연 첫 작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어쨌든 난 낙관주의자예요. 우리 인간들은 말이죠.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겨우 출발했을 뿐이니까.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정말 어떤 존재가 될 겁니다. 난 미래를 믿어요. 이 어린것은 내 딸도, 내 조카도 아니지만요. 이웃을 낯선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모르는 여자일 뿐이지만.
- 로맹 가리, [지상의 주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