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데뷔작, [환상의 빛]을 중심으로
고레에다의 1995년 데뷔작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세계관이 직설적으로 고집스럽게 드러나 있다. 우선 분위기가 매우 건조하고 우울하다. 밝다는 느낌을 주는 어떤 장면도, 어떤 소리도, 어떤 조명도, 단 1초도 허락지 않는다. 그 대신 하나의 장면을 원테이크로 아주 길게 관조하는 지루한 Scene은 과하게 여러 번 등장한다. 대중적 관람의 호흡으로 보기에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전개가 지루하다. 그렇지만, 이런 영화는 잘 만들면 그 지루함을 넘어설만큼 울림이 크다.
그의 세계관이 오롯이 드러나 있는 작품이라, [원더풀 라이프]와 함께 보면 그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다소, 아니 많이 우울하고 쓸쓸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우울하게 보자고 마음먹으면 이 보다 우울할 수 없는 비극의 세계 아니겠는가. 그래도 그의 최근작들은 많이 밝아졌다는데서 위안을 찾을 수도 있으리라. 초기에 비하면야 요즘 작품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밝고 희망으로 가득하다. 너무 유명해진 탓이 아니라, 그의 정서가 조금은 더 긍정적이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싶다.
상실과 고독, 단절과 오해의 대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각자는 각자만의 세계가 있고 그건 웬만해서는 공유되고 소통되기 어렵다. 아니 오히려 거대한 오해와 착각을 통해서만 만날 뿐. 만남이라고 하기엔 서로에 대한 몰이해라는 거대한 강이 가로놓여 있다. 서로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잠깐의 육체적 교감을 통해서만이다. 그것을 만남이라 부를 수 있다면. 사람 간의 관계의 본질과 그 사이에 놓인 거리를 다루는 그가 관계 중에서 특히 '가족'에 천착하는 이유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그 자체를 말하고자 하기보다는, 어쩌면 가장 가깝다고 그리고 가장 서로를 이해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관계에서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단절을 굳이 케어 보여줌으로서, 그 거대한 고독의 심연을 부각시켜 보여주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가족 간에도 거리는 멀고 단절은 놓여 있다. 가족 안에서도 개체는 고독하고 이해받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란 언제나 타인을 향해있다는 데 있다. 타인과 함께 하고 타인과 추억을 나누고 타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싶어 한다. 나처럼 그 사람도, 그 사람처럼 나도, 같은 걸 체험하고 같은 걸 느끼고, 그래서 같은 존재라는 위안. 하지만 그런 기대는 언제나 배반을 동반한다. 그 사람과 나는 같은 걸 체험했지만 같은 걸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원더풀 라이프'는 그런 각자의 기억에 관한 영화다) 같은 마음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면 그 사람의 가장 깊고 진실된 마음을 나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환상의 빛'은 단절된 타인의 마음과 그로 인한 상실에 관한 영화다) 어쩌면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거대한 착각, 또는 내가 빚은 환상이 아닐까.(제목이'환상의 빛'인 이유도 혹시 그러해서일까) 그렇다면 너무 슬픈 일이겠지만, 내가 온전히 타인에게 이해받았던 적이 있었는지를 곰곰이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단절과 거리는 생각보다 아주 멀고 깊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이 살아간다. 왜냐하면,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이 있다면, 따지고 들고 싶을 이런 관계의 딜레마는 가혹하기까지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마치 신에게 따지듯 묻는다. '우리는, 인간은 어디서 구원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까?' 또는 덤덤하게 이 세상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체념하면서 안간힘을 다해 웃어 본다. '그래 인생이란 본래 혼자 가는 길이지' 최근에는 그 웃음의 무게가 좀 더 가벼워졌다.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이 있잖아'라며. ('바닷마을 다이어리'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같은 희망찬 영화들을 보라)
그래도, 본질적으로 그의 세계관은 바뀌지 않았다. 단절과 오해라는 관계의 본질은 모든 영화에서 이미 전제되어 있다. 다만, 그 관계의 거리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다를 뿐. 다시, 영화 [환상의 빛]의 시점으로 돌아가 그가 말하는 '사랑'을 들여다보자. 우린 서로의 마음을 알고 느끼며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거대한 착각이다. 적어도 고레에다에 의하면. 사랑은 거대한 오해이고 대화는 그저 말의 교환일 뿐이다.(영화 초반부에 그들이 나누었던 일상적 대화들을 들어보라) 각자는 각자의 세계를 각자의 기분대로 만들어 가고 사랑이라는 연극에 상대방을 소환하여 부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토록 한다. 주인공은 남편에게 '남편'의 역할을 부여하고 '아내'라는 자신의 역할에 몰입한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남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이건 성 역할의 문제도 아니고 관계의 도덕에 관한 문제도 아니다) 너무 우울한가. 더 우울한 건, 그런 사랑의 연극일지라도, 끝이 나게 마련이고 그것은 나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종결의 이유를 납득할 수 조차 없다. 무대는 강제로 철거되고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남겨진다. 결국 사랑은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혼돈에 불과하다. 나는 그 혼돈에 무기력하게 휩쓸리고 마는 먼지와도 같다. 하지만 먼지가 떠안아야 하는 상실의 무게는 전 우주를 짊어진 것만큼이나 버겁다.
꼭 이렇게 절망적으로, 우울하게, 고통스럽게 바라보아야 했나. 사랑의 그 찬란한 아름다움은 다 어디로 갔는가. 사랑은 인간을 구원하는 위대한 진리가 아니던가.(예수님은 아주 확신에 찬 어조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제발 그 말이 맞길 바란다)
하지만, 예술가란 그런 것이다. 예술가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작품에 옮겨다 놓는 신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 건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세계의 한 단면을 잘라내서 그 단면에 빛을 비추어 조명하고 아주 세밀하고 자세히, 깊게 들여다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계를 영감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후, 붓이든 연필이든 카메라든 적당한 도구를 쥐어들고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이고, 얼마나 그럴듯하게 잘 그려내는가에 예술가의 몫이 있다. 고레에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가진, 가족의 웃음 뒤에 가려진, 사랑과 함께 올 수밖에 없는, 인간 관계의 깊고 어두운 단면을 잘라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중에 그는 다만 후자에 관심을 두고 다룰 뿐이며,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그 후자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가진 혼돈과 단절, 착각에 조명을 비춰, 핀셋으로 인간의 심연을 들춰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들춰낸 인간 심연의 정교함에, 그 깊이에 그의 예술성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그는 단지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지, 무기력한 비관주의자는 아닌 것이다.(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의 세계관을 오롯이 읽고 싶다면, 추천할 만한 영화다. 다만 특별한 사건도 없이 느리고 길게 흐르는 관조의 시선을 지루해하지 않을 정도의 마음의 여유 정도는 필요하다. 설명이 아주 불친절하고 대사는 절제되어 있으며, 이야기는 인과관계가 없다. 그것은 우울한 감독의 악취미 같은 게 아니다. 그 자체가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관의 한 단면일 뿐. 느리고 긴 장면, 낮게 드리우는 소리 같은 음악, 공간과 사물 배치의 미장센을 통해 영화적 화법만으로 말하기를 고집하는 그의 예술적 투지가 고스란히 녹아져 있는, 필름 장인의 처녀작. 심호흡 길-게 한번 내뱉고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난 정말 모르겠어.
그가 왜 자살을 했고, 왜 철로 위를 걷고 있었는지.
그런 거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게 돼.
그 사람이 왜 그랬을거 같아?
- 고레에다 히로카즈, [환상의 빛]
영화가 예술적으로 훌륭했던 만큼, 이런 작가주의 감독이 왕성하게 활동하지 못하게 된 한국의 영화시장 환경이 세삼스레 안타깝게 다가온다. 그런 시장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영화의 예술성을 담보하고 질 높은 영화의 재생산을 담보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관객의 따뜻하고 애정어린 시선과 독려의 목소리 그리고 예술 영화에도 아낌 없이 주머니를 비울 줄 아는 안목에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p.s. 굳이 고레에다와 비교할 만한, 비슷한 주제에 천착하는 작가주의 감독을 꼽자면 국내에는 이윤기가 있다. 그의 작품,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와 [남과 여]는 이해와 소통의 불가능성이라는 주제로 현대 사회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