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生]
세계를 정면으로 본다는 건 힘든 일이다. 다들, 세계의 단면을 떼어내어 그것만 보고 싶어 한다.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우리는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데로만 볼뿐, 그리고 그것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해버린다. 로맹 가리는 이 소설에서 세계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들춰내 보여준다. 우리는 그의 허구적 세계에서 오히려 세계의 진실을 본다. 정면으로 보기 힘든, 외면하고 싶은 그 진실은 보고 있기가 참으로 힘들다. 그는 그걸 알고 있는지 외면하려는 독자의 눈을 다시 돌리려, 아이의 눈을 빌려와 조목조목 구석구석 꾸역꾸역 세계의 엉덩이를 보여준다. 그를 통해 우리는 세계와 인간의 실체를 목격한다. 그리고 그 역겹고 추하고 고통스러운 세계의 한 복판에서 피어나는, 실낱같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시궁창에서 피어난 순백의 꽃 같은. 그 꽃의 이름은, 사랑이다.
그의 작품을 한 두 개는 더 읽어보았으면 한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평생 동안 조금씩 열어보리라. 무언가 일상이 권태롭거나 내 눈앞의 세계가 거짓돼 보일 때, 꺼내 보면 위안이 되리라. 아, 세계가 원래 이렇지. 아, 아름다움은 오히려 추함 속에서 빛나는 것이지. 아니, 추함이 아름다움을 피어나는 게 하는 거라지, 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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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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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Emile Ajar)는, 로맹 가리의 가명이자 필명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데로 보기 마련이다. '한물 간 소설가'로 취급되는 자신에 대한 시선을 못마땅히 여긴, 아직 문학과 삶에 대한 들끓는 애정과 열정이 충분히 남아있는 한 노(老) 소설가가, 자신에게 덧씌워진 가면을 벗어던지고 오적 문학의 본질에만 다시 한번 매달려보고자 스스로에게 재탄생을 부여한 이름이다. 그는 이 새로운 이름으로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콩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콩쿠르 상은 동일인에게 두 번 상을 주지 않는다. 역사상 그가 유일하다.)
당시 그를 폄하하던 평론계가 오히려 에밀 아자르라는 젊은 소설가에게 열광할 때, 그는 속으로 얼마나 통쾌하고 재미났을까.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세상을 비웃는 해학과 위선을 벗기는 도발이 이 보다 짜릿할 수 있을까. 세상 어느 블랙 코미디보다 더 짙은 블랙의 코미디를 그는 현실에서 만들어냈다. 그의 소설은 그의 생(生)만큼이나 세계와 인간의 가면을 벗기는데 탁월하다. 그는 애써 포장하려 드는 인위(人爲)를 물리치고 맑은 눈으로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보고자 하였고, 그럼으로써 그는 생과 사랑의 위대함을, 그 아름다움을 그 누구보다 빛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소설뿐만이 아닌, 그의 생을 통해서 생과 사랑을 살았던 사람이다. 실로 멋지지 않은가. 이런 삶과 이런 작품이라니.
그는 두 개의 이름으로 소설을 끊임없이 발표하는 창작력을 보여주다가, 돌연 어느 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면서 남긴 말은, 내가 보았던 그 어느 유언보다도 멋졌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