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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중요한 건 목적이 아니다.

엘레노어 코폴라, [Paris can wait]

by 빨간우산

매년 나만의 올해의 영화를 선정하는데, 올해는 벌써 올해의 영화를 뽑아버렸다. 바로 이 영화.


개봉은 작년인가 했었고, 그때도 '아, 이 영화 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는데, 우연찮게 TV에서 보게 되었다. 여행을 가도 우연히 접어든 길에서 아름다운 어떤 풍경을 만났을 때, 혹은 그냥 들어선 카페에서 환상적인 디저트를 맛보았을 때 그 감흥이 남다르듯, 우연으로 빚어진 만남이란 계획된 기대와 만족에 비할 바가 아니다.


거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아내 엘레노어 코폴라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우연의 만남과 여행으로 빚어진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우연에 빠지지 않는 로맨스가 주된 소재. 아무런 것도 미리 기대하지 않았을 때 주어지는 선물 같은 설레임과 놀라움의 여정은 결국 로맨스를 빚어내고 그렇게 이어진 순간순간들을 찬란하게 빛내준다. 마치 [비포 선 라이즈]의 중년판 버전이랄까. 풋풋함 대신에 능숙함이, 서툰 열정 대신에 깊은 공감이 로맨스를 엮는 끈이 된다는 게 다를 뿐.


하지만 또 한편으론 이 영화를 '로맨스'라는 장르에 가둬두기에는 아깝다. 이들의 만남과 여행에는 로맨스 이상의, 삶에 대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 그리고 그 시선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을 스스로 반추해보게 하고 지금 내 삶이 어떤지 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묻는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어느 영화에나 나올 법한 뻔한 질문이지만, 이 영화에서 이 대사가 갖는 힘은 단지 뻔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래 잊고 있었던, 삶이 본래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이 남자는 스스로의 태도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적지로 향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들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가령, 이렇다. 우리는 끊임없이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들이닥치게 되고 그리고 우린 또다시 그 문제와 씨름한다. 그리고 해결되면 안도하고, 다시는 그런 문제가 닥치지 않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도 다시 또 터지게 마련이다.(삶이란 그렇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말한다.


"우리 잠시 피크닉이나 즐기죠. 문제는 그냥 거기 놔두고. 문제는 사라지지 않아요. 걱정 말아요."


그렇다. 문제란 항상 있고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해결하려 덤벼야 할 때가 오지만 놔둔다고 해서 어디 가지 않으니 잠시 그냥 놔둬도 된다. 어안이 벙벙해지는 남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어느새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너무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결국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중요한 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이지 않은가?


문제를 해결하느라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질문.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그렇게 질문했을 때 우리는 알게 된다. 우 무언가 잃어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삶의 진실을 복원해 낸다. 인생의 황혼에 다시 찾아온 로맨스뿐만이 아니다. 전투적으로 명소를 인증해야 하는 과제 풀기 식 여행이 아닌, 그저 돌 하나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풀잎 하나도 뜯어볼 수 있는 신기함으로 가득 찬 여행, 단지 눈과 혀를 만족시키는 감각의 음식이 아닌 자연을 알고 사랑하고 음미할 줄 아는 경외의 미식, 출발점에서 도착점까지 어떤 수단으로 언제까지 이동할지를 효율적으로 계산하는 연속된 시간이 아닌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 속에 파묻혀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머무름의 경험.


우리는 삶이라는 여정을 어떻게 가고 있는가?


바로 그런 것들에, 그런 순간들에, 그런 경험들에, 삶의 진실은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삶의 진실을 스스로 지우며 살아가고 있다는 슬픈 현실을, 이 영화는 자각하게 해준다. 영화 제목이 말하듯, 주인공들이 향한 파리는 어서 빨리 안전하게 도착해야 하는 단순한 목적지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을 얼마나 쉽고 빠르게 갈 것인가가 아닌, 누구와 어떻게 어떤 마음과 경험을 나누며 가느냐가 중요하다. 문제는 해결하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있듯, 목적지도 어떻게 가던 거기 그대로 있다. 목적지는 충분히 우리를 기다려준다.


인생도 우리를 기다려준다. 다만 재촉하는 건 우리들 스스로일 뿐. 정작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무엇으로 이 삶이라는 여정을 채울 것인가이다. 그리고 그 여정이란 목적지로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한 과제 수행같은 것이 아닌, 우리가 누려야 하는 삶의 깊은 맛을 채워나가는 풍요로움이어야 할 것이다.



삶이 얼마나 약하고 산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우면서도 멋진가를 기억하려고 (이 목걸이를) 걸고 다녀요.

당신은 멋진 사람이에요. 인생의 깊이를 다 느껴본 사람.


- 엘레노어 코폴라, [Paris can wa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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