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인간의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짧은 식견이지만, 개인적으로 '20세기의 책' 한 권을 뽑으라면, 주저없이 이 책을 고르겠다.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 책에는 20세기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구나. 그리고 그 처참한 20세기를 넘을 수 있는 혜안도 담겨있구나. 카잔차키스라는 작가는 미래에서 보낸 예지자가 아닐까, 그런 허황된 생각까지. 책과 예술에 관해서라면 과장되게 말하는 경향이 있는 나이지만(정작 나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 책을 두고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과장해서 말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책은 그리스 내전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20세기에 벌어진 온갖 참상을 떠올리자면, 그리스 내전이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이 전 세계인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는 지옥보다도 더한 경험이었던 것처럼, 카잔차키스에게 그리스 내전은 세계의 그 어떤 참상보다도 더한 참상이었으리라. 하지만 이 책에서 중요한 건 '그리스'라는 특수성이 아니다. 중요한 건 끝없이 진보할 줄만 알았던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참혹한 결과라는 보편성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이성이 낳은 참상의 보편성을 가진 사건으로 그리스 내전은 등장한다. 작가는 그리스 내전을 통해 인간 이성을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고발에 나서는 인물은 이성적 인간이 아니다. 이성을 쫓았던 수 많은 지식인들이 끝내 버리지 못하는 이성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끊어내고, '네 눈 앞에 있는 걸 그저 그대로 보라'고 고발하는 건 오히려 이성의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야만인, 조르바다.('야만인'이라는 표현은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몰상식하고 무계획적이며, 비합리적인 야만 그 자체이다.)
주인공 '나'의 뜨뜬미지근한 미련과 두려움에 젖은 패배감을 무섭게 꾸짖고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는 사람은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 '조르바'다. 지식인들이 이성으로 장미빛 미래를 꿈꾸며 진보한 인류의 미래에 희망을 걸 때, 그리스인 조르바는 본능과 육체, 직관과 감각, 감성을 앞세워 지금 이 순간의 쾌락을 말한다. 이성과 미래라는 엄중한 화두에 짓눌려있었을 그 하찮고 저열한 몸뚱아리를, 당신들이 말하는 '진리'란 여기에 있다고 과감히 말하는 그를, 우리는 그렇게 간단히 비웃을 수 없다.
'욜로'니 '카르페디엠'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처럼 번지는 지금 시대야 조르바의 말에 공감하기 어렵지 않겠지만, 이 책이 발매되던 20세기의 중반에 이런 생각과 발상은, 위험하고 발칙한 도발이었으리라. 어쩌면 우리가 지금, 육체과 감각을 긍정하고 그 즐거움을 누리는데 있어 죄책감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데는 카잔차키스의, 조르바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하고, 여전할 것이다. 고전의 위대한 가치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단지 카르페디엠에 그치진 않는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정수는, '자유'에 대한 조르바의 철학에 있다.
광기, 사람이라면 약간의 광기가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감히 자신을 묶는 로프를 잘라내어 자유로워질 엄두를 내지 못해요.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자유란 그저 방종이 아님을. '내가 하고싶은 걸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건 그냥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본능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그렇다고 본능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자유란 좀 더 고차원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게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란 인간의 개념이자 인간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차원적인 동물이고, 때문에 자유란건 인간의 고차원적인 노력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행동의 양식이다. (인간 이외의 동물은 '자유롭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자유는 '자유로운 선택'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동물들은 선택하기 보다는 본능에 이끌린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또 한편으론 긴긴 논쟁이 있을 수 있으므로, 각설하고 일단 넘어가자) 자유는 선택으로부터 얻어진다. 선택이란 의식에 의한 생각, 고민, 판단에 따르고, 어떤 방향으로든 선택 행위가 이루어질 때, 자유의 상태가 가능해진다. 자유란 다른 무엇에 의존하거나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행위에서 얻어지는 만족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만족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과감한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 망설이고 계산하고 눈치를 살핀다면, 그건 이미 자유가 아니다. 어딘가에 매여있음을 뜻한다. 이 책은, 자유에 대한 이런 길고 지루한 논의를 한 마디로 끝내버린다. 그것이 그 유명한 '로프'의 비유다. 그리고 그 로프를 잘라내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로프를 좋아한다. 어딘가에 매어있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여기서 '왜'라는 질문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신을 소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굳이 신에 기대어 답을 구하려 하지말고, 조르바의 말에 더 귀기울여 보자. 조르바는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선택하고 행동한다. 과감하고, 즉흥적이고, 두려움 없이. 그리고 돌아보지 않는다. 선택은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그는 선택의 옳고 그름에 매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즐기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는 현명하게도, 그 모든 과정에서 필요한 건 이성이 아닌, 광기라는 걸 알고 있다. 이론이나 생각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를 믿고 헤쳐온 경험을 통해, 그 경험의 축적으로 몸에 새겨진 직관을 통해 안다. 그것이 글로 자유를 배우고 저항으로 자유를 쟁취하고 책 속에서 평화를 찾고자 했던, 이 책의 주인공 '나'(그건 다름아닌 카잔차키스 그 자신이다)가 가지지 못했던 용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책 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이 가지는, 단지 책만으로서가 아닌, 책 이상의 위대함이다.
합리적인 이성이 진보와 낙원을 가져다 줄 거라는 희망이 이성 그 자신에 의해 처참히 짓밟혀지고 남은 폐허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해 헤매이던 유약한 지식인과, 수 많은 청년들, 전 세계 인류에게 조르바는 광기와 자유의 희망을 제시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누가 가르쳐줄 수 있는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찾아내는 것이라고. 그리고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로프를 끊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멀리 앞을 내다보지도 말고, 바로 여기, 네 몸과 심장, 영혼에 충실하라고. 그리고 춤을 추라고, 웃으라고 말이다.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 나는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아직 그렇게 늦은 건 아닐거야'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