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빌뇌브, [컨택트(Arrival)]
철학사에서 가장 화두가 되는 개념은 두 가지다. 바로 '존재'와 '시간'. 이에 대해선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름의 견해를 피력해 왔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하다는 견해부터,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그대로라는 견해, 전능한 신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견해, 결국 인간은 근원을 알 수도 없고 제대로 알 수도 없다는 견해까지..
견해는 제각각이고 합의점은 도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이 논쟁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란 호기심의 동물이라, 끝끝내 존재와 시간의 시원에 대한 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답에 없는 난제가 승리할 것인지, 인간의 끈질긴 지성이 승리할 것인지, 이 또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결과 또한 알 수는 없다. 인간이 신이 되지 않고선 말이다.
그렇지만 신이 돠는 것 말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인간은 추리 능력 이외에 상상 능력 또한 가지고 있다. 상상을 통한다면, 불가능의 난제를 풀어내는 일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그것도 바로 눈 앞에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답을 알지 못하면 상상이라도 해서 그 답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답은, 그런 상상의 산물이 아닐까.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는 그런 상상의 산물이다. 상상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재미 삼아 꾸며댄 이야기 같은 상상과는 다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존재'와 '시간'에 대한 꽤나 철학적인 사유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령, 시간에 대해 말해보자면, 우리가 곧잘 하는 시간에 관한 상상이라면 타임머신 같은 것이 있다. 그러니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상상이고(인간은 후회의 동물이 아니던가), 또 그만큼 실현된다면 매력적인 상상이기도 하다. 이 상상을 좀 더 철학적인 사유로 연장해보자면,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다.
'시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혹은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 것일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인가 싶지만, 질문이란 본래 확실한 것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아니던가. 그리고, 이런 질문 하에 다시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뭔가 헷갈리기도 한다. 이미 아인슈타인에 의해 시간의 흐름이란 그 속도가 다를 수 있다고 '증명'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존재'는 어떠한가. 인간은 언제부터 존재하였는가. 다윈 아저씨에 기대 보자면, 원숭이가 어느 날 똑바로 서서 걷기 시작하던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종교에 기대 보자면, 하나님이 진흙에 숨을 불어넣었을 때부터일지도. 자, 이건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문제 같지만 더 올라가 보자. 존재는 언제부터 '존재'했는가? 흠, 이 질문은 너무 부담스러우니 일단 덮어두자. 신을 소환하지 않고는 대답하기 너무 어려울테니.
컨택트는 바로 이 어려운 질문, 즉 시간에 대한 고민을 담은 영화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면 존재의 시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도 품고 있다. 그리고 열쇠는 신이 아닌 외계인으로부터 쥐어진다. 상상의 산물이긴 하지만, 역사의 철학 대가들이 신을 소환했던 궁여지책과 다를 바 없다. 불가능에 답을 내려면, 인간이 아닌 미지의 존재가 필요할 밖에.
외계인('햅타포드'라고 불린다)에 의해 밝혀지는 시간의 비밀로 들어서는 문은 '언어'다. 이는 아주 단순한 구조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언어가 경험의 방식을 좌우한다면, 시간의 개념을 달리 품고 있는 언어로 사고하면 시간을 다르게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디어는 시간을 직선으로 개념화하지 않은 외계인의 언어라는 상상의 산물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언어에서 시간은 시작과 끝이 맞닿아있다. 그러므로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이다. 즉 직선이 아닌 원의 시간.
그렇게 원의 시간을 담은 언어를 습득한 주인공은 시간을 직선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마치 시간을 내려다보듯, 전지적이다. 그건 신이 인간을 굽어보는 시점과도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험하게 될까. 존재는 생성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지만, 모든 시간을 동시에 경험하는 존재는 시작과 끝이 없으므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면, 시간과 존재의 신비가 논리적으로는 풀리는 듯도 하지만, 실상은 그러기는커녕 더더욱 혼란스럽고 눈앞이 흐리기만 하다(실제로 외계인의 우주선 안은 혼란스럽고 그들은 흐린 시야에 갇혀있다). 상상은 상상일 뿐, 이해하기는 어렵다.
영화는 시간과 존재의 신비를 언어라는 관문을 통해 풀어낸다. 영화의 전개는 지루하지만, 순간순간의 질문은 깊다. 그리고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영화의 전개 밖의 영역에서 맞닿아있다. 마치, 원의 언어를 쓰는 외계인의 시간과도 같다.
시간은 순환하고 존재도 순환하지만, 인간은 알지 못한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다른 언어가 필요하고 다른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통'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다른 언어 간의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외계인과의 불통을 깨기 위해 주인공(루이스)이 뱉는 한마디 말에 그 열쇠가 있다.
나를 보여줘야 해
(They need to see me)
존재와 존재가 만나고, 처음과 끝이 만나며, 나와 타인이 만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두려움 없이 나를 보여주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너와 나의 구분 없이, 다른 시간의 차원을 넘어, 닫힌 마음을 열고 비로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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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모든 열린 사고와 마음은,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는, 그래서 앞으로 얻게 될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되지 않는 지금의 순간에, 나와 너와 모든 존재의 삶이 이 곳에 한데 어우러져 연결되어 있는, 그런 깨달음의 통로가 되어 준다. 존재와 시간의 원이라는 통로로 나아가는 마법의 주문이 된다. 다시 한번 곱씹어보자.
나를 보여줘야 해
영화 속 마법의 주문은 하나가 더 숨겨져 있다. 주인공 루이스가 존재의 합일을 추구했던 딸의 이름이다.
HANNAH (한나)
알파벳이 서로 맞닿아 있는 이름이다.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 이름이다. 앞과 뒤가 없는 이름. 바로 원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