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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세계로 통하는 틈새

짐 자무쉬, [패터슨]

by 빨간우산


그리스 신화에 '시지프'라는 인물이 있다. 인간이면서도 영리하고 눈치가 빨라 신들의 일에 자주 끼어들곤 했다. 그는 그 죄로 형벌에 처해지게 되는데, 무거운 바위를 짊어지고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 꼭대기에 올려 세워 두는 일이다. 오르기가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정작 문제는 이 일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까스로 바위를 굴려 꼭대기에 이르면, 신은 그 바위를 다시 굴려 떨어지도록 하였다. 그럼 시지프는 처음부터 그 일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반복은 무한히 계속된다.


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인가. 이 형벌의 가혹함은 단지 돌의 무게를 이겨내야 하는 물리적 힘겨움에만 있지 않다. 정말로 힘겨운 순간은 돌을 꼭대기에 올려 세우는 순간에 있다. 다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보며 매번 시지프는 무슨 생각을 할까. 언덕을 다시 내려가면서, 그리고 좀 전에 올려 세운 그 똑같은 돌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면서, 무슨 생각을 떠올려야 했을까. 이 형벌의 진정한 가혹함은 바로 그 반복과 무의미에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에게 가해진 이 가혹한 형벌을 인간이 처한 존재의 '부조리'로 말한다.


무대 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로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



부조리와 권태. 인간이 감당해야 할 시지프의 형벌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이란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일까. 그저 무의미한 반복과 추락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짐 자무쉬의 이 영화는 아마도, 카뮈의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감독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염두에 두고 이 영화를 만든 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In the same song,
is the same question.



이제는 거장으로 불려도 이견이 없을, 짐 자무쉬의 최근작 [패터슨]은 반복과 복제의 일상을 지리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역시나 그답게 친절하지 않은 영화. 관객은 그 반복과 복제의 지리함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감당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지리함 한가운데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숨어있다. 복제를 반복하는 일상의 권태. 오늘과 내일은 어제와 오늘처럼 반복된다. 마치 쌍둥이와도 같다.(영화에서는 '쌍둥이'라는 은유가 곳곳에 등장한다)



일상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리고 영화는 일상의 그 복제된 쌍둥이들을 지속적으로 나열한다. 그렇다. 나열된 일상. 바로 뉴저지의 조그만 마을 패터슨의 매일매일이다. 그리고 그 매일매일의 일상에 주인공 패터슨은 패터슨에 갇혀있다.



영화는 닫힌 구조의 이야기(라고 할 수 없는 나열된 Scene)를 단지 요일의 구분만으로 반복한다. 패터슨은 버스라는 돌을 짊어지고 도로라는 언덕을 반복하여 오르고 다시 내려온다.(퇴근한다.)


그렇게 지루한 일상의 나열을 보고 있자면 슬슬 화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은 매일매일의 똑같은 일상에 조금씩 다른 차이들을 슬쩍슬쩍 끼워 넣는다. 기상 시간은 조금씩 다른 분침을 가리키고, 아내의 단조로운 그림도 어느새 조금씩 변주하며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버스의 승객들은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며, 바에서의 화제도 같은 듯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뻔하다.


하지만 영화가 같음에서 다름을 발견해내는 순간, 패터슨은 시를 읊는다.



시도 마찬가지다. 초반부에는 시라고 할 수 없을 단어의 나열일 뿐이다. 성냥갑은 하찮고, 아내를 향한 사랑은 구태의연한 표현들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시는 분열하기 시작한다. 아주 작은 세계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세계의 차원을 말한다. 패터슨이 점심식사를 하는 곳은 그런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리는 공간이자 시간이다. 그것은 일상에서 발견해낸 시의 세계이며, 사물에 부여된 의미의 세계이자, 물리적 차원에서 승화된 고차원의 정신세계다. 도시 한가운데 폭포가 흐르는 기이한 절벽의 좁은 틈새로 시와 의미, 정신의 세계가 열린다. 그리고 그 세계는 더 이상 반복과 복제가 되풀이되지 않는, 권태가 사라진 의미의 세계다. 그곳은 사물을 응시하는 시선과 새롭게 부여된 단어들로 가득 찬다.



무의미하지 않다. 반복과 복제가 아니다. 그곳은 한 인간이 부여한 의미의 세계로 춤을 춘다. 그 광경은 권태롭지 않고, 아름답다.


이 순간 돌을 짊어진 시지프의 형벌은 더 이상 지루하고 가혹하지 않다. 그것은 기쁨의 행위가 된다. 패터슨은 시지프가 느꼈을, 신도 미처 몰랐을, 삶의 숨겨진 기쁨을 알아가는 현대판 시지프다.


잔인하리만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시라는 매체를 통해 삶의 의미와 기쁨을 발견해내는, 시지프의 질문에 답하는 패터슨의 이야기. 이토록 철학적이고도 심오한 문제의식을 영화라는 형식으로 아름답게 구현해낸 짐 자무쉬의 예술가적 장인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영화를 보는 내내는 지루할 수 있지만, 보고 나서는 계속 생각나는 영화. 영화가 끝난 후부터 비로소 영화가 시작되는 영화. 예술로서의 영화가 갖춰야 할 미덕을 훌륭하게 지닌 짐 자무쉬의 오랜만의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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