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하늘에서 내리는 1억개의 별]
이 작품의 주인공 무영은 소설 [이방인]의 '뫼르소'같다.
부조리한 세상과 섞이지 못하고 이물질처럼 부유하는 고립된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사람들은 그를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틀에 가두어 그와는 상관없이 사랑하거나 혹은 미워한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순간을 자주 맞닦드리지만, 대개는 타협하고 만다. 그들이 바라는 시선들과 말이다. 하지만 그런 현실의 시선과 타협하는 순간 자신은 사라진다.
드라마 속 그가 우리와 다른 점은, 그가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득하려고도, 해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몇 마디의 언어와 제스처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세상의 부조리는 너무나 거대하게 내 앞에 놓여있다는 것을 절감하기 때문일지도. 내가 발버둥쳐봐야 그 거대한 부조리의 벽엔 금한줄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세상과의 문을 닫고 자신만의 세계에 홀로 머문다. 그것은 매우 고독한 경험이다. 그리고 공감이 사라진 건조함은 더욱 부풀려진 자신에 대한 억측과 심판을 부른다. 그는 다시 한번 문을 걸어잠근다.
문학작품이면 몰라도 TV드라마에서 이런 인물을 만들고, 이미지로 꾸미지 않은채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론 위험할 수도 있다. 대중들 중 누군가는 또 저 드라마 속 사람들과 같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런 인물은 불편하다. 선하지도 악하지 않은, 그래서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인물은 말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가 주인공이다.
가끔 TV를 보다보면, 대중매체답지 않게 놀랍게도 그런 위험한 시도가 일어나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 아마도, 작가들의 끈질긴 의지와 열정때문이리라.
이 작품의 작가는, 아마도 카뮈의 [이방인]을 염두해 두지 않았을까 싶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 드라마 속 '무영'이라는 인물은 현대인의 삐뚫어지고 겁에 질린 허약함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준다. 소설 [이방인]에서의 '뫼르소'처럼.
문학작품이면 몰라도 TV드라마에서 이런 인물을 만들어내고 이미지로 꾸미지 않은채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론 위험할 수도 있다. 대중들 중 누군가는 또 저 드라마 속 사람들과 같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런 인물은 불편하다. 선하지도 악하지 않은, 그래서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인물은. 그런데 그가 심지어 주인공이다.
가끔 TV를 보다보면, 대중매체답지 않게 놀랍게도 그런 위험한 시도를 종종 볼 수 있다.(아주 예전에 [네 멋대로 해라]의 '복수'가 그런 인물이었다.) 아마도, 작가들의 끈질긴 의지와 열정때문이리라.
이 작품의 작가는, 아마도 카뮈의 [이방인]을 염두해 두지 않았을까 싶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어쨌든 이 드라마 속 '무영'이라는 인물은 현대인의 삐뚫어지고 겁에 질린 허약함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준다. 소설 [이방인]에서의 '뫼르소'처럼.
기무라 타구야가 연기한, 일본 원작 '가타세 료'는 한국판보다 좀 더 드라이하고 냉정한 인물로 묘사된다. 어쩌면 이 드라마에선 그런 캐릭터가 더 어울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