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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May 27. 2020

시인의 말

자연이 걸어오는 말


처음 시인님을 접한 건 전화기 넘어 음성을 통해서였다. 제주에 내려와 서점을 하고 있긴 하지만 ‘시’란 여전히 나에게 미지의 언어였고 그런 낯선 언어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기대와 설렘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네 글자의 말이었지만 차분하고 느릿하게 하지만 정확하게 발음된 네 글자에서 나는 시인의 몸에 베인 운율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강연을 부탁드리기 위한 연락이었는데,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누었음에도 아직도 그 첫마디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걸 보면 말로 전달되는 건 단지 글자와 정보만이 아니구나, 말에도 그 사람의 마음과 감성이 묻어나는구나 하는 걸 새삼 떠올리게 된다. 그 이후로도 시인님과는 이런저런 일들을 같이 기획하고 진행해 왔는데 그때마다 쭈뼛쭈뼛 말주변이 없고 두서없이 일 얘기만 하는 내게 시인님은 일이 아닌 말을 걸어와 주었다. 이를테면, 내가 “시인님, 홍보가 어쩌고...”하면, “네, 그렇군요. 그런데 노을빛이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라던가, “마당에 치자 잎이 시들었어요. 가지치기를 해주면 어떨까요?” 혹은 “너무 예쁘게 피었길래요.”라며 노란 꽃다발을 슬쩍 내밀어주는 식이다. 별 것 아닌 일상의 풍경에 대한 말일뿐인데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금씩 마음에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아 네 그렇네요.”라고 건조하게 말해놓고는 민망해하다가도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노을빛을 한참 보게 된다거나 시든 잎을 바라보며 근심에 잠기고 길가의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나도 가끔씩 시인님에게 날씨며, 꽃이며, 하늘 얘기를 하면서 시답잖게 말을 걸어보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시인님이 쓴 책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한 적이 있다. “꽃의 향기, 물결의 속삭거림, 고양이의 눈빛... 다 말을 걸어오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시인님은 자연이 걸어오는 말을 듣고 그걸로 말을 걸어왔던 건 아닐까. 그리고 나는, 또 우리는 시인의 말을 듣고 자연의 말을 들어보게 되는 건 아닐까. 시에 대해선 시옷도 모르지만, 시인님이 건네는 말을 듣다 보니 비로소 나도 자연의 말을 듣는 법을 조금씩 배워나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시도 들리는 날이 오겠지. 그땐 시인님께 시를 읽어달라고 해야겠다.


- 매거진 '좋은 생각' 2020년 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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