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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ho Lee Dec 09. 2019

Day31 영국의 배신, 스러진 인디언 연합국가의 꿈

폴른팀버즈 전투유적지 (Fallen Timbers Battlefield)

톨리도 인근 모미(Maumee)라는 마을에는 세 개의 역사공원이 있다. 폴른팀버즈(Fallen Timbers) 전투유적지와 폴른팀버즈 기념공원(Memorial Park), 그리고 마이애미스 요새(Fort Miamis) 유적지이다.


우리는 우선 폴른팀버즈 전투유적지로 향했다. 입구 안내판을  따라 방문객 센터로 가보니, 건물 앞에 ‘렌탈용 시설’이라고 적혀 있다. 이 공원의 관리를 맡고 있는 톨리도(Toledo)시에서 원래 방문객 센터를 설립해 운영하려고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오픈을 미루고 이렇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유적지는 1.5마일의 산책로를 따라가면서 당시 전투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도록 중간 중간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입구 갈림길에는 별도의 안내문이 없어서 우리는 왼쪽으로 진입하여 시계방향으로 돌았는데, 전투 종료 이후에 벌어진 일들부터 시작해서, 전투 진행, 준비, 배경 등 설명 내용이 시간상 역순이다. 어쩐지 반대 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싶었는데, 입구부터 시작을 잘못한 거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가는 느낌이다.

폴른팀버즈 전투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국 북서지역(North West Territory)에 대한 얘기부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럽본토와 해외식민지 전역에 걸쳐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7년 전쟁(day 28) 결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프랑스는 손을 떼고 영국이  통제권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영국은 미국 동부지역에 정착한 유럽이민자들과 원주민들간의 충돌로 인해 골머리를 앓게 되고, 광범위한 식민지 전역의 평화확보를 위해서 대규모의 병력과 상상을 초월한 비용을 필요로 하게 된다.


결국 영국국왕 조지 3세는, 1763년에 캐나다의 노바스코시아로부터 남쪽의 플로리다까지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 경계선(1763 proclamation line)을 선포한다(day 11). 이 선을 경계로 서쪽을 인디언 구역, 동쪽을 정착민 구역으로 나누고 서로 상대방 영역을 침범하지 말도록 규정한 것이다.

빨간 점선이 인디언과 유럽정착민 영역을 구분한 1763 선포선

경계선 서쪽인 지금의 오하이오, 인디애나, 미시간, 일리노이, 위스콘신주는 인디언 지역에 해당하였고, 당시에는 북서지역이라고 불렸다(이런 연유로 Northwestern 대학교가 이제는 중부지방인 시카고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식민지 정착민들은 토지가 평평하고 비옥하여 농경과 정착에 최적인 북서지역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고, 경계선을 넘어 진출하여 원주민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이 선을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영국에 대한 반발이 미국 식민지가 반란을 일으킨 원인 중의 하나였다고도 한다.


1775년 미국식민지와 영국 간의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침탈해온 정착민들에 맞서기 위해 영국 편을 들게 된다. 하지만 결국 식민지 반란군이 승리하고 미국은 독립한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본다. 만약에 미국의 독립전쟁이 실패로 돌아 갔더라면, 이들 지역은 영원히 인디언들의 영토로 남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힘들었을 것이다. 설사 영국이 승리했더라도 식민지 정착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인디언 영토의 할당은 불가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립 이후에 미국이 저지른 것과 같은 폭압적인 방법보다는 좀 더 합리적이고 질서있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이 후 미국은 영국과 체결한 파리조약을 근거로, 북서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 부족 추장들을 불러 모아 이들 영토의 상당부분을 미국 정착민에게 양도하는 문서에 서명하게 한다(Fort Stanwix 조약). 하지만 대다수 부족들은 해당 조약의 효력에 이슈를 제기하며 영토 양도를 부정하고, 서로 연합하여 미국인들의 침략에 대응하는 공동전선을 구축한다. 이는 쇼니족(Shawnee), 마이애미족(Miami), 델라웨어족(Delaware), 오집와족(Ojibwa), 오타와족 (Ottawa), 위안도트족(Wyandot), 포타와토미족 (Potawatomi) 등이 연합한 대규모 동맹체였다.


미국은 북서지역의 앞마당인 오하이오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군대를 진출시키고, 인디언 연합부대는 1791년과 1792년 두 차례의 미군 진출을 모두 효과적으로 저지한다. 특히 1792년의 생클레어(St. Clair)장군의 원정은 부대원의 90%가 넘는 630명이 전사하는, 미군 역사상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패배로 기록된다.


이러한 일련의 전투 이후 미국은 좀 더 치밀하게 북서지역 원정부대를 준비하고, 마침내 1794년 웨인장군(Wayne) 휘하의 3천명이 넘는 대규모 원정대가 다시 오하이오 지역으로 출정한다. 당시 캐나다지역의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던 영국은 미국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인디언 부족을 활용하고 있었는데, 미군의 캐나다지역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톨리도 인근에 마이애미스 요새를 짓고 인디언 연합부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다. 그리고 인디언 연합부대도 이 요새 인근에서 진출해 오는 미군에 맞설 준비를 한다.


인디언 부대가 전장으로 선택한 장소는 토네이도로 인해 많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어서 ‘폴른팀버즈’(Fallen Timbers – 쓰러진 나무들)라고 불렸는데, 쓰러진 나무들은 방어에 좋은 엄폐물이 되었다. 공원 산책로를 걷다 보면 안내문이 있는 일부 지역에 쓰러진 나무들이 많이 보이는데, 당시 이곳의 분위기를 느끼게 할 요량으로 일부러 설정해 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안내문 중 하나에는 전투 발생 당시 인디언 부대가 충분히 대비되어 있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는데, 그 이유가 다소 황당하다.


당시 이들은 큰 전투에 대비하여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금식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곧 들이닥칠 줄 알았던 미군은 이틀간 나타나지 않았고(미군은 도중에 보급기지를 설치하는 관계로 이틀을 지체하게 되었다), 매복 기습공격 기회를 기다리다 허기에 지친 인디언 부대 중 다수는 인근에 있는 영국군의 마이애미 요새로 보급품을 받으러 떠나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 시기에 미군이 들이닥친 것이다. 허기에 지치고 일부가 이탈되어 있던 인디언 병력은 그렇지 않아도 수적으로 우세였던 미군에 밀리고 패주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우군인 영국군이 지키고 있던 마이애미스 요새로 후퇴하는데, 영국군은 미군과의 교전을 우려하여 이들 인디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고 영국의 지원도 끊긴 인디언 연합은 이후 미국을 상대할 힘을 잃고, 결국 1795년 그린빌 (Greenville)조약으로 오하이오를 비롯한 북서지역의 대부분의 영토를 미국에 빼앗기게 된다. 이곳 폴른팀버즈에서의 승리는,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진출하지 못했던 북서지역을 인디언들로부터 확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폴른팀버즈 전투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기념공원은 전투유적지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데,  보행 전용 육교를 통해 고속도로를 건너야 한다. 이 공원은 당시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던 어느 영국군 병사의 기록과 지도를 참조하여 전투가 발생한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조성되었다. 하지만 이후 추가적인 조사 결과, 실제 전투지는 공원으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으로 확인되었고, 그곳에 전투유적지가 새로 조성된 것이다.


기념비 위에는 웨인장군, 전투에 참여한 민병대원, 그리고 미군측 인디언 가이드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고, 기념비에는 이들뿐 아니라 전투에 맞서 싸운 인디언 전사들 및 북서지역의 개척자들 모두를 기리는 글이 적혀 있다.

이곳에서 몇 마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마이애미스 요새 유적지가 나오는데, 그야말로 유적지이다. 우리가 이전에 방문했던 윌리엄 헨리 요새(day 28)는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되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비해, 이곳은 요새터만 휑하니 남아 좀 아쉽다.

견고하게 구축되었던 요새에는 대포까지 여러 문 배치되어 있어서 당시 미국의 웨인장군은 공격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러한 요새가 버티고 있음에도 이를 활용하여 항전을 하지 못하고 패퇴해야 했던 인디언 전사들의 안타까움과 영국에 대한 배신감은 매우 컸을 것이다. 이후 영국군은 이곳에서 철수했다가 1812년 미국과의 전쟁이 재발하자 다시 이곳에 진을 치게된다.


당시 폴른팀버스 전투에 참가했던 이들 중에 미국 측에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이 있었고, 인디언 측에는 테쿰셰(Tecumseh)가 있었다. 이들은 이로부터 20년이 채 안되어 각각 양측의 사령관으로 다시 만난다.


오하이오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인디애나(Indiana)주로 들어섰다. 인디애나는 주 이름 자체가 ‘인디언의 땅’이라는 뜻임에도 현재는 인디언 보호구역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인디언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여러 부족을 단합시켜 미국에 맞서려 했던 쇼니족 정신적 리더 텐스콰타와(Tenskwatawa)와 그의 형 테쿰셰가 만들었던 마을인 프로펫츠타운(prophetstown)과, 미국과 인디언 전쟁에서 판도를 바꾼 또 하나의 결정적 사건인 티피커누(Tippecanoe) 전투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이 장소들을 방문한 후, 인근의 라파옛(Lafayette)이라는 곳에서 오늘밤 숙박을 하고 시카고로 이동하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는데, 라파옛의 모든 숙소가 동이 나는 바람에 40마일이나 떨어진 로간스포트(Logansport)라는 곳에서 묶게 되었다. 딸 아이가 검색해 보더니, 라파옛에 위치한 퍼듀(Purdue)대학교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내일이란다. 전국에서 몰리는 신입생들로 인해 모든 호텔이 동이 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이벤트 날짜는 기막히게 딱 맞춘 것 같다.


내일은 시카고로 이동하여 모레까지 휴식하는 일정이다. 인디언 전사 테쿰셰 이야기는 내일 이어서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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