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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ho Lee Dec 21. 2019

Day42 우리를 쫒아내도 아름다운 자연은 지켜주오

시애틀과 시애틀 추장

아는 만큼 보인다.


시애틀 지역은 미국 본토에서는 거의 마지막으로 개척된 곳이다. 1849 샌프란시스코 금광 발견 이후 많은 이주민들이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일부는 태평양을 따라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지금의 오레건주 지역에도 정착지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1851 4월에 일리노이 지역에 있던 데니가족(Denny Family) 일행은 태평양 지역의 새로운 정착지 건설을 목표로 역마차에 오른다.


이들은 오레건주 포틀랜드에 도착한 이후 배를 타고 1851 11 겨울 초입의 추운 날씨에 시애틀 지역 해안에 도착하는데,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역에 거주하던 인디언 부족들의 많은 도움을 받는다. 이들 부족을 이끌던 추장의 이름이 시애틀이었고, 정착민들은 시애틀 추장의 도움에 감사하는 의미로 자신들이 새롭게 건설하는 도시에 그의 이름을 붙인다.

 

시애틀 시내에서 엘리어트만(Elliot Bay) 건너 보이는 곳이 알카이비치(Alki beach)인데, 여기에는 당시 이곳에 첫발을 내디딘 정착민 가족들의 이름과, 이들의 정착에 도움을  친절한 추장 시애틀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알카이 비치에 있는 시애틀 정착 기념비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기념비의 아랫부분에 돌멩이가 하나 붙어 있는데, 1904년에 최초로 자동차로 대륙을 횡단하여 시애틀에 도착한 일행이 플리머스로부터 플리머스락(Plymouth Rock) 가져와서 이곳에 붙였다고 한다. Day 26 플리머스에서 알게 되었던 플리머스락을 대륙의 정반대 편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당시 동부에서는 독립정신의 고취로 사용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식민지 개척의 상징으로 쓰였으리라.

기념비 하단의 플리머스락

시애틀 추장은 수콰미쉬(Suquamish)족과 두와미쉬 (Duwamish)족의 추장으로 초기 정착민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도시명으로 남겼을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에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중요성에 대한 아름답고 멋진 편지를  저자로 알려져 있다.

 

많이 알려져 있는 그의 편지는 인디언의 땅을 사려는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성격인데, ‘당신들은 어째서 땅을 사유화하려는가. 우리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살아가야 하고  땅에 흐르는 냇물, 나무, 바위, 하늘, 짐승 모두 함께 공존해야 한다. 당신들은 강하기에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땅을 가져가겠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공존의 정신을 잃어버리지 말아달라. 우리와 당신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아름다운 환경과 공존할  있도록 약속해달라 같은 내용이 매우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런 내용의 글을   있는 사람이라면 대단한 철학자이자 시인이 아닐  없기에 시애틀 추장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막상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로 시애틀 추장이 미국의 대통령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다는 근거는 없다고 한다.


1855년에 당시 워싱턴 지역의 주지사를 맡고 있던 아이작 스티븐스(Isaac Stevens) 시애틀 인근 지역의 땅을 인디언들로부터 확보하기 위해 해당 지역 추장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시애틀 추장이 미국인들에게 일장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32년이 지난 후에 헨리 스미스 (Henry Smith)라는 인물이 당시 그의 연설을 받아 적었다는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시애틀 추장의 편지가 등장한다.


이후 해당 내용의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는데, 당시 헨리 스미스가 받아 적었다는 원본이 이후 시애틀 대화재로 소실되었다는 바람에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헨리 스미스가 공개한 내용은 현재의 버전처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아니라, 정들었던 땅을 떠나야 하는 인디언들의 슬픈 심정에 대한 것이 주였다고 한다. 이후 해당 내용은 여러 명의 작가들에 의해 추가, 수정되기 시작하였고, 1972년에 ‘Home’이라고 하는 환경운동 관련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가 만들어지면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시애틀 추장의 편지라는 형식으로 다시   각색되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시애틀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도 존재하지 않았고, 시애틀 추장의 연설 내용도 이처럼 유려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미국인들의 인디언  침탈에 맞서 1856년에는 여러 부족의 연합군이 시애틀의 백인 거주지를 공격하는데, 이러한 공격 정보는 백인에 우호적이었던 시애틀 추장 등을 통해 사전에 미국인들에게 알려지고, 결국 기습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전투는 시애틀 지역에서 미국인과 인디언간에 벌어진 거의 유일한 충돌이었고, 이후 인디언들은 모두 보호구역으로 수용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애틀 시내 곳곳에 있는 시애틀 추장의 기념비를 어떤 관점으로 봐야  것인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시애틀 파이오니어 스퀘어에 있는 시애틀 추장 흉상

신생의 시애틀 정착지는 인근에 울창한 침엽수림이 자리잡고 있어, 샌프란시스코의 금광으로 인해  수요가 발생한 목재의 주요 공급원으로 산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보잉사를 통한 항공산업, 마이크로소프트를 통한 IT산업,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커피산업, 아마존의 온라인산업에 이르기까지 시애틀은 새로운 산업을 선도하는 도시로 미국 내에서도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런 빠른 성장 배경에는 미국의  어느 도시보다 진보적이고 관용적인 문화가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시작은 새로운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데니씨 일가와 열린 포용의 정신을 보여주었던 시애틀 추장간의 인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애틀 추장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있을 것이다. 어쨌건, 그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였고, 훌륭한 연설가였던 것은 분명한  같다.


이제 ‘미국 인디언을 찾아가는 아주 오래고  특별한 미국여행이야기를 진짜로 마칠 시간이다. 42일간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충분히 전달하기엔 매일 매일의 일정이 너무 촉박했고, 글의 분량도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원래 계획했다가 일정상 들르지 못했던 장소들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그래도 우리의  여정이  글로써 함께  모든 이들에게 즐거움과 새로움을 전달하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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