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봄의 꼬리가 길다. 이맘때쯤이면 더위가 활기차게 손 흔들 시간인데, 아직 벚꽃의 인사엔 미소가 맺혀있다. 길었던 준비기간을 드디어 끝냈다. 지극히 현실을 위한 공부도, 이것을 증명하는 시험도. 다 떠나보냈으니, 이제 내 손에 남은 건 없다. 결과만을 기다리는 이 시간을 무척 그리워했다. 이제는 떠날 차례다.
그간 홀로 쌓아온 괴리에 많이 아파했다. 최소한의 현실을 위해서 가져야만 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싫증이 몰려왔다. 아, 물론 당장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래 간직했던 꿈을 찾겠다며, 멀쩡한 직장을 내팽개쳤던 때가 벌써 반년이 넘었다. 꿈을 등지기는 싫으나, 주위의 것들이. 그리고 나 자신이. 자존감을 갉아먹고 심연으로 내몰았다. 별이 다 꺼져버린 하늘처럼, 내 낭만도 급격히 지는 듯했다. 그러다가 결국 이러한 사유가 나에게 고개를 내밀더라. 미련한 꿈이 없었으면 더욱 현실감 있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안정적인 삶을 위해 더 노력하고, 빌어먹을 나태의 몸집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조금 괴팍해졌다.
다시 두통이 밀려오려고 한다. 다급하게 털어 넣는 진통제처럼, 거칠게 시동을 걸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목적지는 근교 바다였다. 최근에 1시간이라도 운전한 적이 있었던가? 아마 없었던 것 같은데. 단조로웠던 삶에 허풍 낀 동정을 베풀어 본다. 그래도 바깥의 정경은 참으로 유려하다. 얼마 만에 짓는 걱정 없는 웃음일까. 배웅해 주는 벚꽃의 높이를 가늠해 본다. 꽤 높네. 하지만 나의 동경은 저 하늘빛에 걸려있다. 물론, 현재 나의 위치는 저 벚꽃만도 못하지만.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샀다. 남으면 다시 가져가면 된다. 뒷좌석에 와르르 쏟았다. 한쪽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던 싸구려 브랜디가 주르르 밀린다. 평소 소비의 형태를 중요시하던 가치관이 나를 나무란다. 너무 적게 산 거 아닐까. 갸우뚱할 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그럴만하다.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숙소로 가는 길은 평일의 잔잔함을 달렸다. 즐겨 듣는 플레이리스트와 스쳐가는 꽃들에 소소한 산뜻함을 챙길 수가 있었다. 과정을 잠시 내려놓고 떠나는 혼자만의. 이제 좀 여행다운 느낌이 났다.
내려가는 산 중턱에 우뚝 솟은 숙소였다. 근처에 민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어깨 펼친 산과, 도로, 그리고 부채꼴로 뻗은 바다만이 있었다. 몹시 만족스러웠다. 이곳이라면 고요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친절한 관리인의 안내를 받았다. 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홀로 여행을 온 일에는, 그것도 평일에. 아마 완연한 휴식을 목적으로 잡았겠지. 넓은 평수,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하얀 인테리어와 공기청정기, 널찍한 TV와 아주 푹신한 퀸 베드까지. 혼자 놀기엔 이만한 곳이 없었다. 더불어 녹음 깔린 발코니는 푸른 망토를 끝없이 걸치고 있었다. 여기저기 윤슬로 장식해 둔 그 광경에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에 당연한 듯이 매혹되었다. 검은 암벽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꽤나 오랜 시간을 내 곁에서 머물렀다.
멍한 시선에 흰나비가 현란하게 춤을 춘다. 자기를 좀 봐달라는 듯, 바다빛에 반사된 그 모습이 눈부시다. 우연히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걸까. 무언가를 찾으러 온 건가. 너도 혼자서 왔니? 꽤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렇게 일직선으로 시야를 가로질러 어딘가로 떠났다. 하얀 잔상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깜빡, 어느덧 노을이 진다. 대양의 왼쪽 어깨가 확실히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내 뱃고동은 더욱 가벼운 노래를 흘렸다. 오기 전에 알아본 바로는 숯불 닭구이가 배달이 된다고 했다. 바비큐는 직접 해 먹어야 진정한 낭만이라 할 수 있겠으나, 온몸에 냄새가 배는 것이 싫었다. 혼자서 떠나왔기에 낭만을 현실과 타협하기에도 자유로웠다. 그렇게 당장 주문한 뒤에 남은 짐들을 차분히 정리했다. 오르골처럼 퍼지는 음색이 가장 가벼워졌을 때쯤, 기다리던 식사가 배달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노을빛이 번진 숙소 광장에서 픽업을 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가던 와중, 관리인을 마주쳤다. 무언가 더 필요한 게 없냐는 질문에는 과할 정도의 친절이 담겼다. 조금 갸우뚱했으나 괜찮다는 감사의 웃음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저녁상을 펼쳤다. 낮과 밤의 줄다리기가 가장 팽팽한 지금이 좋았다. 유일하게 하루 중 보랏빛 하늘을 구경할 수 있는 때이기에. 훈연향이 가득한 닭다리를 와그작 뜯었다. 바삭한 껍질에 발린 소스가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충분히 공기를 머금은 브랜디가 혀를 적셨다. 달다. 무척이나. 아카시아 꿀을 그대로 마신 것처럼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다. 커다란 숨을 길게 내쉰다. 흡족하다.
줄다리기는 어느 해산물 게임의 장면처럼 금세 무너졌다. 직사각의 유리창 밖으로 깜깜함이 풀썩 주저앉는다. 낮의 것들은 중턱 아래로 무력하게 낙하한다. 음, 몇 잔을 더 비웠던가. 슬슬 셈을 잊을 때가 됐다. 말차 카스텔라와 커피맛 웨하스를 한 번씩 집어먹는다. 지금이 가장 안주가 깊은 맛을 낼 때였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로운 차에 두고 온 계란빵이 생각이 났다. 끼이익. 문이 닫히자 어둠이 날 반겼다.
터벅터벅 올라가는 계단이 괜히 을씨년스럽다. 주위엔 당연히 가로등도 없다. 단지 자그마한 장식용 전구들만이 길을 밝힐 뿐. 어라, 접객실도 불이 꺼졌다. 그래서 나한테 친절한 거였군. 몇 번 고개를 끄덕이니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 차가 하나밖에 없다. 지금 여기는, 오로지 나 혼자만이 존재했다.
모든 객실이 텅텅 비었다. 그 누구도 이 숙소에 있지 않았다. 난 고요를 찾으러 왔는데, 홀로 남은 공포가 매섭게 들이닥쳤다.
큰 소리와 함께 투박한 문이 닫혔다. 다급한 숨이 찬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선 다시 자리에 앉는다. 막연한 공포는, 어느새 진정한 고요로 빠르게 자리를 잡는다.
어둡다. 조용하다. 망망대해에 떨어져 단 하나의 불빛만을 밝히는 쓸쓸한 등대의 기분이었다. 밤하늘에는 별조차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야릇한 기분이 든다. 현재의 내 모습과 똑같지 않은가.
본래 마음에 검정만을 칠했었다. 끊어낼 수 없는 사유의 잔가지는 나를 항상 우울감에 적셨다. 회색이었다면 그나마 좋으련만, 태어난 성격에는 자비가 없었다. 어느 순간에, 소심한 문학 소년은 스스로가 무척이나 볼품없어 보였다. 현실성을 가지자. 내가 가진 끝없는 저 나락의 깊이만큼 현실감으로 무장할 수 있다면. 양극단의 조화를 추구한다면 아름답고 빛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많은 현실과 미디어에서 만날 수 있는 항성들의 한 줄기를 눈망울에 새겼다. 그러더니 검은 바탕에 최초의 동경이 담겼다. 그리고 그 알맹이는 빛나는 하나의 별이 되었다. 칠흑이 밤하늘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밤하늘이 열리고 별자리를 차근차근 수놓아갔다. 비록 작은 동산에서 바라보기에도 벅차지만, 난 항상 밤하늘의 이카루스를 꿈꿨다. 숨 죽은 태양에 밀랍 날개가 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동경은 내 낭만의 이정표이자 완연한 목적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보이지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였던 수많은 별들이. 내 눈앞에도, 마음에도. 마치 마음의 풍경을 현실로 끄집어낸 듯했다. 각자의 색감을 가진 방안의 것들이 허망하게 스러졌다. 또 대부분의 하양은 어둠에 굴복한 듯했다. 쓸쓸하고, 무서웠다. 불안정한 미래의 길은 형체가 없어서.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눈을 감자. 뜨던 감던 어차피 동일한 세계다. 너라도 편하게 쉬어라. 감은 채로 남은 고배를 모조리 들이붓는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미식조차 잃었다. 음미할 것은 오로지 심연 하나였다.
문득 하얀 나비의 춤이 그리워진다. 어디로 먼저 떠나버린 걸까. 너의, 예쁜 발악에는 정처가 있는 듯 보였는데. 무척이나 부럽구나. 그 호선의 일렁임을 떠올린다. 흰 끝자락이 멈춘 곳에는 무거운 눈물이 맺힌다. 섬찟하게 나를 타고 흐른다. 티끌 하나라도 낭비하기엔 몹쓸 짓인데. 생각이 빗나간다. 왈칵 뿜어져 나온다. 작은 신음으로 첨벙한 주위를 쓸고 닦는다.
갑작스러운 급류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잠깐의 소리조차 찰나에, 확실하게 포식한다. 수렁에, 어떻게든 익사하기 전에 감정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 밤은 원래 그런 거야. 보이지 않아도 나비는 날고 있을 것이고. 파도 또한 끝없이 밀려올 것이며. 별들 또한 잠깐 잠에 든 것이니.
애쓴 위로에 안쓰러운 어깨는 더욱 진동이 심해진다. 부질없다. 처참하다.
쓰라린 혼자만의 끝자락에서, 밤의 꼬리가 어떻게든 끝나기를. 이곳, 고독과 무음의 세계에는 홀로 남은 울음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