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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 작가 Dec 01. 2021

고통, 인간, 그리고 예술

 생각 노트 #08

  고통 없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고통이 필연적으로 투과하는 길이다. 고통에서 해방된 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이다. 초인간적인 존재인 부처나 예수 등, 거룩한 자만이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고 미련 없이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고통과 끊임없이 부닥치는 인간의 생은 불행한 것일까. 하지만 나는 고통이 인간에게 필연적이나 필수적인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간은 다른 생물보다 월등히 창조에 대한 욕망과 진취가 남다르다. 물론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통을 느끼지만 인간은 더욱 특이점을 갖는 것 같다. 자그마한 고통, 즉 불편함을 이겨내고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편안한 상태를 항상 바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신체를 움직였고, 도구를 만들었으며 자신을 비롯해 주위 환경을 바꿔나갔다. 자그마한 까칠함을 걷어내려는 행위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위대한 행위는 하나의 기반이 되어 과학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행위에 어느 정도의 편안함이 가미되었을 때, 창조성은 새로운 방향으로 눈길을 돌린다. 편안함을 위해서가 아닌 순수한 욕망을 위해서, 오감의 희열과 원초적이고 정신적인 쾌락을 위한 것, 바로 예술이다.




 진보하는 과학과 함께 예술도 같이 성장해갔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한다고 한들 인간의 편안함이 우상향을 항상 바라봤던 것은 아니다. 역사는 피로 얼룩진 거대한 전도(戰圖)이다. 전도는 끊임없이 몸집을 불리며 지금 이 순간에도 시뻘건 피가 물들여지고 있다. 인간의 시기와 질투는 그들의 본능을 이기기에 충분했다. 다른 이들의 과학과 예술을 파괴했다. 죽음이 불가피한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눈 뜬 예술에 대한 욕망은 식지 않고 오히려 불타올랐다. 선혈이 흥건한 억압은 예술에 대한 아주 붉고 매운 시즈닝이었다. 편안함이 아닌 불편함이 극에 달했을 때, 예술은 절대적인 성취를 또 발돋움했다.




 인간 전체로 이해하기엔 광범위하며 공감성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나 한 사람으로 고통과 예술을 바라보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일 아침은 뭘 먹을지, 출근하면서 어떤 커피를 사 먹을지, 점심은 어떤 사람과 무엇을 먹을지 등 모든 게 정신적인 고통의 한 부분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예술이 된다는 말인가 라며 코웃음 칠 수도 있다. 예술이란 인간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모든 것을 뜻한다. 우리가 어떤 것에 감탄을 느끼면 '예술이다!'라는 추임새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오전은 매일 간편한 건강식을 먹는 사람은 내가 바라보는 몸의 아름다움을 증진시키기 위한 의미가 담겨있다. 점심 식사를 다양한 이들과 먹으려고 하는 사람은 날마다 기록되는 점심시간의 다채로움을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저녁을 소중한 이와 보내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추억이라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자 땀 흘리는 자이다.




 최근, 전역한 특수부대원들이 각 부대의 위상을 어깨에 지고 활약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했었다. 나는 국가의 부름으로 다녀온 군 복무이지만 특수부대는 의미가 달랐다. 자신이 떳떳이 결정한 지원에, 혹독한 훈련을 버티며 나라를 지켜주신 감사하고 대단한 분들이라고 칭송한다. 주위 사람들과 특수부대원은 인간이 아니다는 과장 섞인 대화를 하곤 한다. 군인이 인내하는 고통의 크기를 잘 알고 있기에, 특수부대원의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위상만큼 어마어마할 테니까 말이다. 프로그램 또한 방송이기에 보여주는 것에 한계가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범인(凡人)을 쉽게 능가한 이들이라고 경탄했다.




 그중 한 분이 유독 눈에 띄었다. 화가를 본업으로 하시는 분이셨다. 자신의 한계를 부딪혀보기 위해 특수부대원이 된 것이 놀라웠고 경외감이 들었다. 수많은 의도와 작품이 있겠지만 프로그램에 비친 몇 가지의 작품은 자신의 마음과 주위 환경에서 비롯된 고통이 담겨 있었다. 편안함이 아닌 불편함에서, 고통에서 예술을 찾아낸 것을 보고  머리가 둔탁한 것에 맞은 것처럼 띵했다. 나의 예술, 글의 원천도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하나의 볼(bowl)과 같이 생긴 그릇이라면 고통을 비롯한 감정은 그것을 빚어내는 행위일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하나의 행위라는 절대적인 값을 도출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선을 넘어간다면 한계에 부딪힌다. 부딪히며 주름이 지고, 금이 가며, 결국 깨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남들보다 거대한 것을 받아들인 그의 마음은 얼마나 넓고 깊은 그릇일까. 그리고 그것에 진 수많은 주름들과 생채기는 우리가 스테이크를 구워 먹을 때 칼집을 내는 것처럼, 감정이라는 시즈닝을 더욱 잘 흡수할 것이다.



 그는 나와 같은 나이에, 더욱 철저한 자기 관리, 확고한 신념 등 나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치를 가지신 분이었다. 질투와 패배감은 들지 않았다. 마음에서 불길이 일었다. 거대한 무기력함을 견뎌내고 조금씩 바른 길을 찾아가던 와중에 거대한 태양이 뜬 기분이었다. 너무나도 뜨거워서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극렬하게 즐거웠다. 거무튀튀해질 것 같으면서도 숨을 들이쉬는 찰나에 짜릿한 생동감이 스쳤다. 태양을 바라보는 눈이 멀어도, 불탄다고 해도 좋았다. 온전해도 살아있다는 느낌이 없으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니 말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창조성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부터 시작한다. 물론 사전적인 생존이 아닌, 생존을 감각할 수 있는 그 상태이다. 오감은 고통을 수반하고 결국 감각하게 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다. 건강하지 못하면 우리가 겪는 순수한 고통 또한 반감될 수 있다. 온전한 신체에 느끼는 고통은 정신을 단련하는 촉매제가 된다.




 고통에 지긋지긋하고 패배감으로 찾아왔던 말로는 이제 다른 색을 띨 것이다. 고통으로 예술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 인생에서 편안함보다 고통이 많았던 것인지, 고통을 더욱 예민하게 느껴서인지는 모른다. 아니, 오히려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고통을 느끼는 것이 나쁘지 않다. 그리고 이것으로서 마음의 등화는 켜지며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침표를 향해 달려가는 여정인 지금에도 나는 고통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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