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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란 무엇인가

by 훈자까

유리잔에 반짝한 레모네이드가 눈이 부시다. 내 시선을 타고 간 빛깔은 온 세상을 채웠다. 카페에 다채로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과일가게 수채화가 눈에 띄었다. 조명의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일까. 레몬과 같은, 화폭에 송송이 맺힌 알맹이들이 쭈뼛하면서도 더욱 빛이 났다. 한순간에 정신을 빼앗겼다. 울리는 눈썹 타이머에 눈물을 조금 감아내고 나니 화폭이 흐려진 듯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온 세상이 화폭처럼 흐린 것 같았다. 아니다, 흐려진 게 아닌 밝아진 것이었다. 오늘은 무척이나 밝고, 아름다운 그런 날이었다.

자그마한 낭만을 음미했다.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감상하는 나를 인지할 수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현실의 것들이 가득하지만, 나는 감상에 뛰어들고 낭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이곳의 테이블과 의자의 색상 조화가 내 마음에 가득 차오른다던지. 아니면 음료를 오순도순 제조하는 카페 직원들의 웃음이라던지. 혹은 그 옆에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고풍스러운 장식물까지. 그리고 그 장식을 밝게 비춰주는 반구 형태의 조명 또한.

계속해서 시선이 움직인다. 조금 더 가까이. 맞은편의 새하얀 선반에 눈길이 그쳤다. 두툼한 사진첩 네 권이 질서 없이 쌓여있고, 옆에는 투명한 집이 있었다. 물이 가득 찬 유리 재질의 집, 그 안에는 날개를 펼친 연녹색의 식물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잠시, 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봄 향기인가 싶었다. 아니면 지나가는 행인의 향수 꼬리인지. 혹시 지금의 나만 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의 진행형일까. 또 향기에 홀려 킁킁대던 와중 자기도 관심을 바라는 펑키한 팝송까지.

아, 당장 내 앞에서 주말에도 업무 전화를 받고 있는. 오랜 시간이 녹아들어 다분히 편안한 친구도 있었다. 끝으로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까지, 현재의 풍경에 담았다. 내가 일상적으로 바라는 낭만은 이 공간에 대부분 존재했다. 갑작스러운 머리에 미룬 숙제를 닮은 뿌연 기억이 스쳤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인간관계에 대한 환멸감에 살고 있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지금의 가득한 낭만이 한순간에 날아갈지라도, 노크했던 사유를 위한 대답을 그려내야 했다.


최근 내가 가진 기대 혹은 욕망의 일정량을 내 영역 안의 사람들이 채워주지 못했다. 글로 적으니 실로 이기적이고 지극히 한심해 보인다. 그리고 알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솔직한 내 마음이니까. 적어내야만 한다.


나는 다른 이들이 가진 각자의 영역을 방문함에 즐거움과 살아있음을 느낀다. 상대방의 50을 알기 위해 나의 55, 혹은 80까지도 보여주는 호구 같은 사람이다. 그만큼 사람을 알아가는 게 즐거운, 혹은 근원적인 외로움이 거대한 사람이다.


그런데 더 이상 사람을 알기 싫어졌다. 그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피드백에 생겨난 실망감들이 수북이 쌓인 탓일까. 내가 계획한 대로 일상이 흘러가지 않아 심술이 났다. 그러자 순진한 의구심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왜 나는 사람을 알고 싶어 하는 걸까. 더 나아가 사람을 만나서 충족감을 채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무기력한 사람일까.'

다른 이들은 알기 싫었으나,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은 멈출 수가 없었다. 기어코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사람, 나를 탐구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붉은 모터는 끊임없이 쿵쾅거린다. 지금 나는 온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자신의 성격과 마음에 대한 의심을 행한다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그 근원을 찾아 완벽한 식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시도해서 무형의 것에 약간 가까워진 접근을 바랄 뿐.


친구의 전화가 끊긴 지 한참이 됐을 무렵, 길었던 고찰을 마쳤다. 꽤 만족스러운 문장들을 얻었다.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나에 대한 수많은 해석 중에서 처음으로 반발심이 들지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했기에 당연한 이치라고 코웃음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의 고찰은 의식할 수 있는 모든 기억들의 찬성표를 받아내는 과정이었다.


야릇하고 한편으로는 뿌듯하다. 깜깜한 것들이 끊임없이 스쳐가는 세상에 일직선으로 된 하얀 건널목을 세웠다. 자석에 무차별적으로 달라붙는 철 조각 같은, 정립하는 가치관에 올곧은 기준을 세웠다. 그리고 하얀 기준을 따라서 걸어가고자 하는 본능을 나의 낭만이라고 정의하겠다.


‘어떤 사람이든 각자의 기준을 기반으로 낭만을 가지고 살아간다. 세상은 현실이고, 현실은 세상 전부를 결코 주유할 수 없다는, 아쉬운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입한다. 그럼에도 누구나 부닥쳐오는 현실을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을 품고 있다, 그것이 낭만이다.’


나의 낭만을 한 단어로 칭하자면 ‘사람’이다. 사랑과 가장 비슷한 단어이자 내 삶의 원동력이다. 그들이 무수히 인사하는 백색의 길을 걸어가는 일이, 내 행복이자 인생일 테니까.

이제 딱딱한 심술은 다 풀렸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당장 차오른 건 아니다. 깨진 정원을 고치기만 했을 뿐, 꽃을 들이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솟구치는 감정을 회피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낭만을 저버리는 일이니까. 조금 목이 텁텁하다. 어느덧 황금빛 잔은 전부 투명해졌다. 또 어떤 이의 호기심이 나를 낭만으로 이끌고, 다시 깨뜨릴까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당연해야 할 만남이다. 아직 미련 많은 감정들을 의연하게 다잡는다. 나는 또 무언가에 홀린 듯 더 많은 것을 건넬 것이고, 색다른 상처를 되받을 것이 명백하니까 말이다.


정원의 대문 앞에는 수많은 이들이 줄지어 서있다. 각기 다른 표정을 짓는 저 꽃망울들을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정원사에게 마음이 아픈 일은, 가지치기나 자연재해인 것일까. 겪어야 하는 당연한 현실이 문득 새롭게 피어난다. 사랑도, 사람도, 낭만도. 원래 아름다운 만큼 아픈 것임을. 싱그러운 웃음을 짓고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커다란 문 앞에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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