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생각 노트

능소(凌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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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자까

마음 어딘가 매달려있는 추억 한 장을 그린다.


몸과 정신이 멍할 정도로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마감 직전의 언덕에 솟은 카페에서 수박주스를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마셔도, 곧장 열이 났던 그 흥미롭던 하루에.


자정이 넘어도 잠은 뒷전이고, 갈색 굴다리가 몇 겹이나 엉켜서 미로를 헤매듯이 간신히 어느 역을 빠져나왔던 나에게. 흐트러진 가로등 사이로, 그들의 키보다 조금 더 작은 담장에 매달린 꽃 하나.


능소라고 하던데. 넌 아직 하늘을 넘기에는 키가 많이 작은 것 같더라. 그때에 나는 오히려 하늘보다는, 그저 중간의 온도에서 무심하게 흘러가고 싶었는데. 그 미온한 하루도 나에겐 너무나도 뜨거웠어서.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굽는 게 정상인데, 오히려 더 높은 곳만을 바라보더라.


또 언제의 선선한 여름날, 친숙한 일자 코스 러닝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이번엔 무더기로 핀 능소화들이 내 발걸음을 멈췄다. 원래 능소라는 건, 어느 중간 높이에만 피는 꽃인 걸까. 그래서 하늘을 넘본다는 의미가 있는가 싶었다.


예쁘고 많이 핀 이들이 나를 쳐다보더니, 묻는 것 같았다. 아직도 하루가 그렇게 뜨겁냐고. 아니, 난 하늘만을 바라는 게 좋아. 그저 너희 담장의 규칙도 정해진 높이도, 잘 모르겠어 사실.


어느 끄적거림을 담아둔 내 서재의 배경도 너희들이야. 높은 곳과 하늘을 바라는 모습이 좋은 게 아니라, 그저 피어있는 송이의 모습 자체가 무척 내 취향이었거든. 과거와 지금의 대비도, 사실 마음만 다를 뿐인 거겠지.


그래 난 그냥 핀 채로, 무심하게 선선한 하루들을 보내고 싶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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