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모어책방 Oct 15. 2021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소년의 새 동네는 키카 큰 아파트였다. 맨 위 5층부터 1층까지 한 번에 달음질할 수 있던 낡은 동네가 더 이상 아니었다. 해 질 녘 작은 공터로 나가도 나무 사이에서 야구를 하는 아이들도 이제 없었다. 집 앞 도로에서 오가는 차들 사이 아슬아슬하게 배드민턴을 하며 어둑해질 때까지 뛰어다니던 동네 아이들도 없었다. 소년은 이따금 가로등이 켜진 아파트 놀이터로 가서 테니스공을 던졌다. 엄마가 오려면 아직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새 학교는 그 동네 아파트들만큼이나 어수선했다. 새 책상과 의자는 좋았지만 채 마르지 않은 페인트 냄새에 가끔 머리가 어지럽고는 했다. 늘 그렇듯 누군가는 어지러움 속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익숙함과의 결별이 기회가 되었던 모양이다. 소년은 지금도 그렇듯 미련이 많았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어울려 다니던 세 친구들과 인사는 했던가. 친구에게 빌렸던 리코더는 돌려줬던가. 집에 가는 길 무영이 녀석이 나타나 욕을 해댈 때면 내게 탄탄히 부딪히던 친구들의 어깨가 생각이 났다.


그 동네 길현이는 야구선수로 중학교에 갔대.


매일 같이 소년의 공에 성심성의껏 배트를 맞추던 동네 형은 어느 중학교 야구부에 스카웃이 되었다고 했다. 형을 따라서 야구부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4학년 때 반대항 야구대회에서 1회전 탈락을 하고는 전학을 했다. 가끔 그때 야구 잘할 것 같은 이름의 소유자, 김권투를 유격수를 시킨 1회전 경기가 꿈에 나오곤 했다. 권투가 평범한 내야 땅볼을 가랑이 사이로 흘려보낼 때, 소년의 유년시절도 흘러가버린 것 같은. 슬픈 꿈을 소년은 꾸곤 했다.


압바스 감독의 영화 '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봤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아버지가 빌려온  예술성 가득한 영화를 보고, 소년은 108 버스를 탔다. 친구 네마제대를 찾아 길을 떠난 아마드처럼, 가장 친했던 친구 상헌이가 생각났던 모양이다. 너부대대한 얼굴에 약간 광대가 나왔던 상헌이. 오랜만에 만나 어제처럼 이야기하고 놀다가 늦기  집에 가야 했던 소년에게 상헌이는 아끼던 그림책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그림책이 그렇듯 빛나던 어느 순간도 그림자 속에 숨어버렸다.


내년에 reception에 가는 아이를 위해 주위 학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 학교는 Ofsted에서 Outstanding을 받았대. 어느 학교는 괜찮은데, 조금 아이들의 가정환경이 다양하대. 어느 학교는 생각보다 괜찮아서 놀랐대. 내년은 low birth year여서 웬만하면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을 거래. 누구는 private을 보냈는데 French를 가르친대.


내년에 겨우 만 4살밖에 안된 아이가 학교를 간다니 안쓰럽기도 하고. 공부 안 해도 되는 private이 있으면 거기로 보낼까.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우선 지원하기로 아내랑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나니, 나의 모든 바람들이 내 유년시절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다. 명절이면 저녁 즈음 아랫동네에서 휘두르던 쥐불놀이의 흔들리는 불빛이며, 동네 담벼락에 나뭇가지로 세워놓은 우리들만의 아지트며, 야구선수가 된 형이 깨 먹은 우리 집 창문이며, 어릴 적부터 자라온 친구의 그림책이며, 시시로 부딪혀 오던 친구들의 건강한 어깨까지.


어느 날 독일인 친구가 구글맵으로 브레멘 근처 자신이 자란 고향 동네를 보여주며 '여기 사람들은 여기서 자라서 여기서 죽어'라는 이야기를 참 멋있다 생각한 것도, 아이에게는 지루함이 될는지. 내 부모가 그러했듯, 지루한 욕망을 네게 투사하려 드는 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