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아들 둘 아빠 되기 1
영국에서의 여름은 턱없이 짧다. 반년 가까운 길고 긴 겨울의 우울과 침묵을 Fool's spring이라는 매우 짧고 일시적인 햇살 좋은 봄날을 거쳐, 차가운 비와 구름이 지배하는 3월과 4월을 지내고, 6월에 이르러야 지구온난화로 비롯된 이상기온을 잠시 만났다가, 8월이 이르러서는 나무 그늘에만 들어가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바야흐로 여름이 끝나는 것이다.
그런 8월이 시작되면, 옷장 안에 숨겨두고 싶었던 재킷을 주섬주섬 꺼내 들고서는 외출할 때마다 몸에 페어링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추워서 닭살이 돋은 것은 아니었다. 아내가 생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어느덧 한국 나이로 서른아홉. 아홉수라 했던가. 회사에서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승진에 치이고, 집에서는 만 4살 아들 녀석의 장난감 공룡이빨에 치였다. 물론 결혼 후 사뭇 달라지고 매일 달라지는 아내의 성격...이 아니라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하며 팬데믹으로 인한 단순해진 인간관계와, 성향과 맞지 않는 remote work로 인해 달리 스트레스를 해소할 곳이 없는 그녀의 환경에 나도 종속된 것도 문제였을 것이다. 다투는 일과 화해하는 일 사이 간극이 벌어지지 않게 바쁜 와중에 둘째라니.
계획하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나이도 있고 잘 안될 줄 알았지. 다만 한번 중간에 유산을 겪었고, 그 일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아내를 위해 '당신을 위해 한번 더 노력하겠소'라고 선언한 것이 문제였을까. 손가락 다 접을 때까지 시도하기로 했는데 더 손가락을 빨리 접었어야 했나. 생각보다 건강한 내가 문제인 걸까.
답 없는 질문이 배회하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축하해 아내, 너무 감사하다"
아마 몰랐을 거야, 몰랐겠지.
사실 아내조차도 반반이라 늘 이야기해 왔다, 둘째를 가지는 것에 대해. 첫째 아이가 만 3살 반이 넘어가니 말도 통하기 시작하고 어디 데리고 다닐 만해졌기 때문이었다. 작년 Easter 때는 바르셀로나 여행을 약 10년 만에 갔는데 그게 아이가 태어나고 갔던 첫 도시여행이었다. 그전에는 차를 1시간 이상 타면 엣헴 목청을 가다듬고는 끄아아까아악 소리를 지르시고, 물놀이는 싫어하시지만 모래놀이는 좋아하시던 분을 위해 어디 조용한 바닷가에 놀러 가는 일이 전부였다. 그런 그가 드디어 위대한 가우디의 건축작품들을 즐기며 (그에게는 그저 공룡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공룡 타워 정도였겠지만) 우리와 고딕지구 식당에서 빠에야에 애플주스를 곁들여 식사를 하실 수 있게 되었는데 말이다. 더 이상 어린이집 비용으로 매달 200만 원 넘게 쓰지 않아도 되면서 집에 돈이 좀 돌기 시작했는데.
한편 아내는 나를 닮은 딸이 있으면 너무 이쁠 것 같다 했다. 간혹 다른 집 이쁜 딸들에게 너털웃음을 짓는 나의 약점을 철저히 파악한 연유였다.
"아니 근데 결혼 전에는 아이 낳아서 기르는 게 자신 없어서 결혼 망설이고 하지 않았어?"
스코틀랜드 겨울바람처럼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자칫 만족할 뻔했다.
"그때는 그 때고"
무심한 부동심결 같은 아내의 무력화 마법이 나의 전신을 감쌌다. 나의 표독스러운 눈빛은 흐려졌다.
그래, 둘째가 있으면 마을에 유일한 한국 아이로 크고 있는 첫째에게 좋겠지. 서로에게 의지도 되면서 힘도 되어주며. 아이를 가져야 한다면 더 나이를 먹기 전에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첫째를 위해 둘째를 가지긴 싫었다. 그 아이 스스로가 우리에게 오기에 충분히 가치가 있고 귀해야 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이름이 있듯이 그 아이의 이름이 의미가 되어야 했다. 그래, 이 아이는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 줄 거야. 또 인생을 가치 있고 기쁘게 살아갈 거야.
어라.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왜 나 설득되고 있지?
그렇게 우리는 넷이 되었고 나는 울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