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아들 둘 아빠 되기 2
첫째 아이를 가진 지 4개월 즈음되던 때에 한국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 해 한국의 겨울의 파편들은 기억 속에 여전하다. 영국의 겨울보다 차가운 마른 공기와 분주히 걸어 다니는 사람들. 홍대에서 망원동으로 걸어가던 골목길, 해가 빌딩 숲 속으로 뉘엿뉘엿 지는 걸 보며 생각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키겠다고. 아이의 첫 신발, 첫 슬립수트, 첫 배냇저고리를 사며 마음에 즙이 날 때까지 다짐했다.
출국을 얼마 앞두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영국에서는 병원에서 연락이 오면 대체로 좋지 않은 일이다. 좋은 일은 에너지와 우편 비용을 아낄 겸 연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화를 받은 아내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쉽게 대화 내용을 물을 수 없었다.
conversion rate이 2%인 제품이 있다면 아마 상당히 혹독히 리뷰를 할 것이다. 방문자가 물건을 구매할 확률이 2%라니, 아무리 대충 만든 제품이라도 2%는 넘겠다며. 좋은 일이 벌어질 확률이 2%라면 이처럼 상당히 비관적으로 들릴 텐데. 나쁜 일이 일어날 확률 2%는 꼭 일어날 일 같다. 정상수치가 1:270 인 것을 고려하면 2%는 태양이 내일 동쪽에서 뜰 확률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양수검사를 받지 않기로 했다. 양수검사로 그 결과를 확인한다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픈 아이든, 아프지 않은 아이든 그 아이는 태어날 권리가 있었고 우리에겐 책임감을 갖고 양육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결정은 내렸지만 혹시 아프게 태어날 아이가 겪게 될 삶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보다 먼저 갈 가능성이 높다는데.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늙어 세상에서 사라질 때 아이는 누가 돌봐주지.
교회에서 자주 마주치던 어떤 할머니와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다니는 아픈 아들이 자꾸 생각났다.
다행히 아이는 주변의 기도 속에서 건강하게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눈 사이가 먼 것 같다며 내가 안심하지 않자 아내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고 아내와 나는 주름이 꽤 늘었다. 가끔 구글포토에 결혼하기 전과 아이가 태어나기 전 우리의 사진을 보며 우리가 저 때는 참 젊었구나 이야기 나눈다. 아직 마트에 가서 와인을 살 때면 ID를 보여달라고 하는 것으로 자족하기엔 확실히 우린 늙었다. 그래서 둘째를 갖고서 가장 걱정된 것은 또 다른 병원으로부터의 전화였고, 그 전화를 받고 더 어두워진 아내의 얼굴이었다.
"왜 태명이 잠잠이야?"
주변의 질문에 대한 답은 정말 간단했다. 참 잠잠하게 강한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임신 6주 차에 강행했던 아내의 한국행은 사실 최악의 시나리오도 각오했던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내는 할머니를 모시며 늙어버린 아버지와 장례를 치러야 하는 어머니를 걱정했다. 임신 초기였던 것을 고려하면 16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비행을 무조건 격려할 수는 없었다. 둘째를 갖고 싶어 했던 아내의 마음도 알고 있었고, 몇 번의 유산을 지나며 아내의 몸도 많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가야겠다는 아내를 히드로 공항으로 데려다주던 M4에서, 가는 길도 길었던 만큼 우리의 침묵도 길었다.
'서방 한국 잘 도착했어요'
아이는 견뎌냈다. 도착한 후 병원에 와 있다는 드라마틱한 아내의 문자는 다행히 없었다. 아내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장례일정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바로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할머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얼마 남지 않은 장례일정 속에서 손님들을 맞고, 장례식장 한편에서 쪽잠을 자며 가족들을 도왔다. 혹시 잃어버렸을지 모르는 무언가의 가치가 아내를 무겁게 했는지 모르겠다.
장례를 마치고 아내는 산부인과로 향했다. 한국에서 첫 스캔이라니. 영국에서 첫째를 가졌기에 임신 초기를 한국에서 보내는 건 아내에게 처음이었다. 남편도 없이, 가족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몰래 갔던 동네 산부인과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낯선 공간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아내의 손 끝이 떨렸겠다. 스캔이 진행되는 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가락이 모아 졌겠지.
"축하해요, 임신 6주 차네요"
아내는 스크린 위로 보이는 곰젤리처럼 달콤한 존재감을 마주하고서야 안심했다. 산부인과 선생님이 꽤 푸근한 분이라 도움이 되기도 했겠지. 다시 곧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장시간 비행이 괜찮을지 묻는 아내의 말에, "지금 가야면 가야죠 뭐"라고 하셨다니. 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 한국에서 만났던 뾰족했던 산부인과 선생님의 얼굴이 스쳐갔다.
사실 첫째 아이의 임신과 출산에는 더 많은 이슈들이 있었다. 임신 초기에 출혈이 있어서 검진을 받다가 아내가 다른 질병을 진단받았다. 문제는 이 치료가 임신과 병행할 수 없어서 결국 출산 후에 치료를 진행해야 했다. 한국에 갔을 때도 이 문제로 산부인과 진료를 했는데, 그때 그 뾰족한 선생님이 질병 원인과 관련해 나를 질책하셨다. 증명해 보일 수도 없는 문제였는데... 돌아보니 참 일도 많고 상황도 다양했던 첫 임신과 출산이었던 것 같다.
잠잠이는 반대로 참 조용했다. 기형아 검사 후에 병원에서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우리의 나이와 첫째 때 확률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감사하게 다 정상이었다. 첫째 때는 하지 않았던 private scan도 많이 했는데, 그때마다 다 너무 정상이고 잘 자라고 있다는 이야기 외에 들은 적이 없었다. 엄마의 뱃속에서도 비교적(?) 잠잠한 편이었다.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첫째 아이는 '우루릉쾅쾅'의 느낌으로 아주 활발하게 움직였다면 둘째 아이는 '꾸우우욱' 하고 움직였다. 태동에서 성격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까, 우리는 같은 성별이어도 사뭇 다를 둘의 성격을 상상하며 웃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임신은 없다. 첫째 때 발견된 문제의 치료로 인해 조산의 가능성이 있었는데, 팬데믹 이후 붕괴된 영국의 NHS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래 NHS는 한국에서의 언론보도와 달리 꽤 믿을 수 있을 만한 시스템이었다. 감기와 같은 작은 질병은 잘 취급하지 않지만, 암이나 큰 질병에 대해서는 무료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에는 대응이 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때문에 영국 사람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기도 하고, NHS 예산 확보나 증가와 같은 문제는 선거 때마다 큰 쟁점거리가 된다.
문제는 팬데믹 이후 여느 나라나 그렇듯 늘어난 비용과 부족한 인원으로 인해 상당히 삐걱되고 있다는 것이다. 치료 대기기간도 몇 주 단위에서 몇 달 또는 그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고, 있는 인원들의 번아웃으로 인한 멘털 문제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덕분에 대체로 임신 10주 차 즈음에 만나게 되는 midwife도 만나지 못했고, 조산 가능성에 대한 스캔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조산 위험에 대해 제대로 조언하지 않는 의사를 만나 private까지 가서 제대로 된 조언을 구해야 했다. 그 이후에도 NHS에서 제대로 follow up은 되지 않아서 다른 해결책을 내야 했는데, 평범한 임신은 없다는 명제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한다. 처음부터 완성된 아빠는 없다는 걸. 느린 것 같고 더디 가는 것 같은 열 달을 품어야 하나의 생명이 태어난다. 그 열 달 동안 물속과 구름 속을 지나야 첫눈처럼 고귀한 결정이 되어 이 땅에 떨어진다. 이렇고 저런 일들을 지나, 마음 졸이고 걱정하며 기뻐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가득 채워야 비로소 이 작은 아이와 작은 유대감을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잠잠히 있어준 아이에게도 고맙고, 이런저런 염려를 지나 건강하게 태어나 준 아이에게도 고맙다.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