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아들 둘 아빠 되기 3
앞서 언급했듯 영국의 출산 시스템은 midwife로 불리는, 산파들이 리드한다. midwife들은 임신 초기 진단부터 각종 scan을 위한 예약, 임신 주요 주수 모니터링, 출산 계획, 출산(!), 출산 후 관리 등 정말 다양한 역할을 맡는데, 의사가 아닌 사람이 이런 일들을 맡는다는 게 한국에서는 좀 생소할 수 있겠다. 물론,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다 하진 않는다. 임신 확정 후 한 명의 midwife가 배정되지만 경우에 따라 다른 midwife를 보는 경우도 있다.
영국에서의 임신을 생각하면 첫째 때 처음 children centre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담당 midwife에게 처음으로 임신을 확인받고 나오는 길, children centre 앞에 빨간 단풍잎들이 따뜻한 가을햇살을 받아 빛나던 모습. 그때는 차도 없었고, 걸어서 20분씩 가야 했는데도 그 오가는 길을 참 즐거워했다. 둘째의 경우 담당 midwife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팬데믹 이후 엉망이 된 NHS와 1월에 침수되어 버린 children centre 때문이었다. midwife와 약속대로 갔다가 1시간씩 기다린 후 몇 번이고 취소돼서 화난 아내를 데리고 돌아왔던 걸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그래도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만났던 긍정적이고 따뜻했던 midwife들 덕분에 이 걱정 많은 시기를 잘 버틸 수 있었다.
임신이 후반기에 접어들던 어느 날, 미팅에서 새 담당 midwife인 Kelly가 물었다. 키가 큰 그녀에게 다소 작은 듯한 랩탑 스크린에서 커서가 천천히 깜빡였다. 우리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녀가 천천히 복습을 해주었다. "Birth plan은 말이야, 너희가 어디에서 출산을 할 건지, 누구랑 같이 할 건지, 수술/자연분만을 할 건 지 등에 대해 선택하는 거야".
안 그래도 몇 주전 그녀가 birth plan에 대해 언급했던 날, 아내에게 묻긴 했었다. 이번에는 수술로 할 거냐고. 첫째를 출산할 때 가진통만 3일, 진진통만 꼬박 하루를 견디며 고생했던 아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큰 눈을 꾸움뻑하며 대답했다. "아니, 이번에도 자연분만 할 건데? 수술은 출산 후 회복도 오래 걸리고 싫어요."
돌아보면 아내는 참 용감한 사람이었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몇 번 돌다리를 두들겨 보다 포기한 나와 달리, 결혼 후 과감히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마칠 때 즈음 갑자기 처음 들어본 레딩이라는 도시에 다음 날 인터뷰를 보러 오라던 recruiter의 전화에, 선뜻 기차를 타고 가서 인터뷰를 보고 와서는 job을 얻었다고 이야기를 했던 그녀였다. 무통주사와 제왕절개가 보편적인 나라에서 자랐지만, 진통제 하나 먹지 않고 온몸으로 진동하며 첫째 아이를 낳기도 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남자들만큼 용감한 여자들을 이야기하며 사자를 향해 총을 쏴본 적 있느냐고 묻던 헤밍웨이의 말처럼.
자연스레 나는 그녀의 용기에 동참할 기회를 많이 얻었다. 유학을 떠난 아내와 자주 만날 수 있는 해외사업팀장을 맡아 튀니지에서 일해 보기도 했고, 휴직을 하고 유학을 하던 아내에게 날아가 런던 단칸방에서 도시락을 싸주며 한 달 동안 지내보기도 했고, 서른이 지나 영국으로 와 새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선택을 했고, 아내와 함께 분만실에 들어가 birth partner로 두 아이를 받아보기도 했다.
birth partner. 수술이든 자연분만이든 영국은 출산 시 산모가 최대 2명의 birth partner를 데리고 와서 출산을 할 수 있다. 이 birth partner는 배우자일 수도 있지만, 친구 일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다행히 아내의 선택은 늘 나였다. 출산이라는 하이퍼레어급 포켓몬에 대항하는 카드로 나는 적합했을까. 어떤 남편들은 분만할 때가 트라우마로 남는다는데.
사실 자연분만의 최대 이슈는 자궁문이 언제 얼마큼 열리느냐이다. 처음 진통을 시작할 때는 1-2cm에 불과한 자궁문이 active stage로 접어들며 6cm 이상 열려야 분만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얼마만큼 배가 아프든 병원에 와봤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진통이 길었던 첫째 때는 두 번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가진통이 얼마 시작되지 않아 피 비침이 있었던 둘째 때는 병원에 입원은 했지만 자궁문이 8시간 동안 거의 열리지 않았다.
무한도전을 보며 너무 여유롭게 걸었던 탓일까. midwife는 마침내 축객령을 내렸다. "자궁문이 아직 2cm 밖에 열리지 않았어. 집에 가서 좀 목욕도 하고, 좀 더 걷고 와야 할 것 같아." 규칙적으로, 강한 진통을 느끼던 아내에게는 날벼락 맞는 소리였다. "아니, 이렇게 자주 규칙적으로 진통을 느끼고 있다고!" 내가 진통을 잰 기록을 보여줬음에도 마른 체구의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낙심한 아내를 데리고 조금씩 출구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아내가 주저앉고 말았다. 걸을수록 고통이 너무 세졌기 때문이었다. '어떡하지' 집에 가려고 해도 갈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birth partner는 손발이 허둥대셨단다. 내향인인 그는 다른 midwife에게 한번 더 measure를 부탁해 보자는 아내의 의견에 적극 지원하지도 못했다고 하지. 다행히 병원 복도에서 서성이던 우리를 본 다른 midwife가 다시 재보자고 했고, 다시 쟀을 때 2시간 전과 달리 6cm가 열렸다고 했다. "그냥 집에 갔으면 큰 일 났을 것 같아. 정말 다행이야." 다른 병실에 다시 누워서 아내는 미안해하는 birth partner에게 너그럽게 말했다.
분만을 하는 공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첫째를 낳았던 곳은 꽤 넓은 병실이었는데 오른쪽에 1인용 메디컬 베드가 있었고 왼쪽에는 짐볼과 출산을 도울 도구들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있는, 다소 황량한 공간이었다. "음악을 틀까?" midwife와 내가 묻자 아내는 손을 저었다. 배우 황정민처럼 September라도 틀면 쫓겨날 분위기. active stage로 넘어가고 약 5시간 진통을 거쳐 오후 5시 반 정도 출산하기까지, 아내는 초산의 거침을 음악도 없는 황량한 공간을 견뎌냈다. 영국 여성들이 선호하는 집과 같은 분위기의 분만실은 단연코 아니었음에도.
둘째 때는 그보다 조금은 작은 공간이었는데, 걱정과 달리 midwife도 처음에는 두 명이 들어왔고 그 뒤 분만이 늦어지자 다른 midwife들이 더 들어와 4명의 midwife들로 꽉 차게 되었다. 이미 active stage로 넘어갔을 때가 저녁 6시였기 때문에 분만실은 짙게 어둠이 내렸다. 아내의 메디컬 베드 위 라이트가 조용히 빛을 내고 있었고, 아내는 "둘째라 빨리 낳을 수 있을 거야"라는 midwife들의 격려와 달리 4시간 진통 후에야 겨우 출산했다. 둘째가 뱃속에서 뒤가 아닌 앞을 보고 있었던 것. "오래 걸린 게 이유가 있었네" 기록을 위해 들어왔다가 출산을 돕게 된 나이가 많은 midwife가 말했다.
"너도 한번 볼래?" 아이의 머리가 나왔을 즈음 짧은 머리의 midwife가 물었다. 호기롭게 "그래"하고 아내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는데, 아이가 해리포터의 맨드레이크처럼 눈을 감고 소리를 지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름진 작은 얼굴이 양수에 덮여 누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고, "아이가 아빠와 엄마를 보고 나오고 싶었나 봐"라는 midwife와 달리 두 눈을 꼭 감고 분주하고 시끄러운 세상에 나오기 전 마지막 평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 모든 출산이 있기까지, 머리가 짧던 Eimear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midwife는 몇 시간이고 허리를 숙여 진행도를 확인하며 "push, push, push"를 외쳤다. 모두가 그녀의 허리를 걱정했는데, 그녀는 직업상 괜찮다며 출산이 끝났을 때 싱긋 웃고는 다른 방에서 진행되고 있는 출산을 도우러 갔다. 나이가 조금 있던 Kiran은 출산 진행이 늦던 아내를 많이 격려해 줬는데, "이렇게 해서 나오지 않을 것 같아"라며 울먹이던 아내를 다독이고 한번 더 힘을 줄 수 있게 해 줬다. Anna는 아내가 옆으로 돌아서 힘을 줄 때 엄마처럼 아내를 꼭 껴안고 손을 잡아주었다. 다들 이 이방인 가족에게 그들이 해야 하는 것보다 조금 더 견뎌줬다, 우리가 심지어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첫째 때도 느낀 것이지만, 아이는 스스로 자라지 않는다. 태어난 것은 그저 땅에 씨앗이 심기운 것에 불과하다. 그 씨앗이 자라고 싹이 나서 열매를 맺기까지, 가정과 사회, 국가가 그 생명을 함께 보호하고 양육할 책임을 나누게 된다. 저출산율을 걱정하면서 주 69시간을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모순 그 자체이다.
영국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출산과 육아에 우호적이라 하더라도,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아빠의 출산휴가까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평균적으로 영국에서 아빠의 출산휴가는 2주 정도인데, 18주에 달하는 스웨덴이나 12주의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나 25일의 주변국 프랑스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물론 한국은 아직 2주도 요원하다). 그래서 나는 회사에 거듭 물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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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회사 HR과 주고받은 슬랙에서의 대화.
발모어책방: "16주라고?"
HR: "응 (뭐야 얘는)"
발모어책방: "에이, parental leave에서 차감되는 거 아냐? 우리 아내가 그거 다 쓸 건데"
HR: "아니 너 아빠 출산휴가, paternity leave가 그렇다고 (영어 못하냐)"
발모어책방: "와 그렇구나... 무급이겠지?"
HR: "무급노노. 100%. (아이 귀찮으니까 그만 꺼져줄래)"
발모어책방: "... 말씀만 하십시오 주인님, 평생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아빠인 나를 위한 출산휴가가 16주인 것을 깨달았지만, 4달을 자리를 비운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다. 더군다나 우리 팀은 팬데믹과 내부 비용 이슈가 맞물려 전반적으로 리소스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팀장이기도 하고, 진행 중인 큰 프로젝트가 2개, 리드를 맡고 있는 클라이언트만 6개... 4달을 가겠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친한 다른 consulting part에 있는 친구는 이걸 몇 달에 걸쳐 나눠 쓰겠다고 하더라.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인 director가 내게 말을 걸었다.
한국 음식 좋아하는 director: "홍홍홍 발모어책방, 이제 곧 출산휴가지?"
발모어책방: "봉쥬르! 네 그렇지요"
한국 음식 좋아하는 director: "나눠 쓰지 말고 꼭 붙여서 쓰도록 해"
발모어책방: (뭐지 함정인가)
나는 보다 정확한 감을 얻기 위해 associate director인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 친구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살아서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에게 유럽 감성 한 스푼이 필요할 때 큰 도움이 된다.
발모어책방: "... 이러저러한데 나 출산휴가 나눠서 써야 하지 않을까?"
영국화된 독일인: "아니 그냥 한 번에 쓰는 걸 추천해"
발모어책방: " (당황하며) 아니 팀 상황도 이렇고 그런데 그게 되겠어?"
영국화된 독일인: "괜찮아. 내가 너라도 그렇게 쓸 거야"
이 외에도 인수인계 때문에 미팅을 하거나 업무를 받아야 했던 팀의 동료들 중 누구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빈틈없는 나의 전담마크를 받아왔던 클라이언트들도 내 공백으로 인해 분명히 어려움이 예상됨에도 (그렇겠지?) 우리 회사나 나에게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모두 축하한다며, 그저 복잡해진 프로젝트의 미래에 대해 담담히 대응할 뿐이었다. 특히 내가 자리를 비움으로 큰 프로젝트 1개뿐만 아니라 우리 팀원들 관리까지 맡게 된 영국화된 독일인 친구는 가끔 이런 유머짤이나 보내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 줬다. 그 외에는 어느덧 12주가 지난 지금, 회사에서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
그 12주 동안 둘째라 훨씬 여유로움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나는 하루 2시간 이상 자유시간을 갖는 일이 어려웠다. 아내도 육아휴직 중이고, 심지어 장인장모님까지 출동하셨음에도 말이다. 출산휴가 전에는 공부도 하고, 글도 자주 쓰고, 책도 읽고 하며 세운 계획들이 많았는데 돌아보니 시간이 너무 지나가 버렸다. 억울한 건 없는 게 그 사이 꽤 분주했다. 밤새 잠을 설친 아내가 자는 동안 아이를 보기도 하고, 첫째가 학교에서 다녀오면 함께 놀고 책을 같이 보기도 하고. 함께 산책을 가기도 하고, 장도 봐오고. 가끔 요리와 설거지, 청소.
그것은 역설적으로 한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일이, 첫째든 둘째든, 그냥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것이 쉬워야 한다. 밤마다 우는 아이들로 인해 분명 밤잠을 설친 이웃들, 4달 동안 자리를 비운 나로 인해 일이 늘어난 회사 동료들, 출산휴가로 인해 리소스 계획에 어려움을 겪을 회사의 관리자들, 연속성 없는 진행으로 인해 힘겨웠을 클라이언트들 - 그들의 '쉬운 이해' 덕분에 둘째는 세상이 엄마 뱃속만큼 따뜻하고 평화롭다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쉬운 이해'가 없이는 저출산이라는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