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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모어책방 Apr 20. 2020

28일 후

 영국이 코로나에 대처하는 법, 그 후

일어나 보니 28일이 지났고, 세상이 변했다.


학교를 다닐 때 봤던 대니 보일의 28일 후는 그렇게 시작한다. 교통사고 후 입원했던 짐은 병원에서 깨어나 보니 아무도 없음을 깨닫는다. 텅 빈 런던의 국회의사당 앞 다리를 지나, 피카디리 서커스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는 쪽지들을 보며 배회하던 짐의 얼굴의 내비취던 당혹감.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황량함이 실제 우리네 삶에 찾아온 지도 28일 정도 지났다. 3월 23일 총리 보리스 존슨이 피곤한 얼굴로 3주 간의 전 국민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발표한 후, 일상은 새로운 길을 내었다. 국가의 리더로서 이 새 질서에 대해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스스로 열심히 손을 씻지 않음으로써 결국 전 세계 정부 수반 중 처음으로 확진자가 되는 본을 보였다. 이로써 우리 국민들이 손을 열심히 씻겠지. 아마 그는 ICU에서 기침과 고열로 신음하며 생각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손만 씻으면 안 걸려요라고 외쳤던 그의 바람과 달리, 사람들이 결국 손을 잘 씻지 않았나 보다. 쓰러질 만큼 고열이 아니면 검사도 받기 어려운 곳에서 확진자는 11만 명을 넘었다. 사망자는 1만 5천 명을 넘겼고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지금 쯤 되면 보리스 존슨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인 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고열과 치명적 상황으로 가기 전에 테스트를 받았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그가 내보내고자 했던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에서 온 의사들과 간호사들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내가 아는 지인은 젊은 나이에도 기침과 고열로 고생했지만 몇 번의 요청에도 테스트를 받지 못했고, 결국 쓰러질 정도가 되어서야 병원으로 옮겨져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마저도 산소호흡기만 제공받아 고생을 하다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퇴원은 했는데, 호흡기가 상해 완전한 회복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거라고.


과학자나 질병학자가 아닌 이상, 정치가로서 보리스 존슨이 일부 과학자나 Advisor Group의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한다. 다만 그는 앞서서 동아시아와 이탈리아의 사태를 보고도 대영제국에게는 닥치지 않을 일처럼 여겼던 것인지. 이탈리아에서 하루에 확진자가 몇 천명씩 나고 사망자가 몇 백 명씩 날 때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테스트 장비는 말할 것도 없고 의료진들을 위한 기초적인 보호장비조차 없어 의료진들의 사망이 느는 것을 보고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입니다"라는 그의 남 이야기하는 듯한 태도는 현실적인 것일까, 공감 능력이 없는 것일까.


영국 언론들이 테스트-추적-격리라는 성공적 모델 대신 PPE (의료진들을 위한 보호장비)에 더 집중하는 것도 문제를 악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생각한다. 자가격리를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보도, 사망자들의 스토리에 대한 보도는 끊이지 않는데 정부의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적다. 가디언의 외교 분야 편집장인 Patrick Wintour의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100일 특별 기사 "Coronavirus: who will be winners and losers in new world order? (코로나 바이러스: 새 질서 속에서 누가 승자와 패자가 될 것인가"의 시각 역시 아쉽다. 기사에서 저자가 주요 논지로 인용한 철학자 한병철의 '아시아 국가들이 유교사상이 기반이어서 국민들이 국가의 정책에 잘 순응했다'는 식의 논리도 상당히 오리엔탈리즘스럽다. 한국 언론들에 독일이 한국의 광범위한 테스트 모델을 따라 했다는 기사들로 가득하다는 표현에서도 영국 특유의 부정적 뉘앙스가 느껴진다.

 

(Guardian: Coronavirus: who will be winners and losers in new world order?)

당연했던 우위가 뒤집힌 사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가상히 여겨야 할까. 다만 나는 BBC Laura Bicker가 비판했듯 '한국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대통령을 탄핵했으며,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민주주의 국가고 이것이 결과'일뿐이라 생각한다. 강경화 장관의 인터뷰 내용처럼 까다로운 국민들의 필요를 맞추기 위해 한국 정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을 뿐이라고 말이다. 물론 Patrick Wintour가 한국 언론들이 얼마나 이 방역의 성과가 한국 정부 때문이 아니다고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 리는 만무하다.  


(업데이트) 4월 20일 가디언에 실린 Polly Toynbee(그 유명한 역사가 Arnold Toynbee의 손녀 great-great niece)의 칼럼은 그래서 흥미롭다. 'Boris Johnson is the wrong man in the wrong job at the wrong time' 칼럼에서 보리스 존슨이 가진 1) 태만, 2) Herd Community라는 정책적 실패 3) 현재의 PPE와 인공호흡기 부족이 예견된 사례였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 등 조목조목 국내 다른 친보수 성향의 언론들과 연구자료조차 비판하고 있음을 지목하고 있다. (추후에는 한국 등에게서 배워서 준비해야 함을 언급한 것은 신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스 존슨에 대한 긍정평가가 55%로 여전한 점은 아직 정부의 방역 정책에 대해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덕분에 영국에 살면서 한국 사람인 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것을 느낄 시간이 많지는 않다. 나를 둘러싼 대부분의 이 곳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잘 대처했는지 모르고, 그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사람들은 한국 등지에서 이뤄지는 추적 후 격리라는 것이 가지는 개인정보 침해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면서, 영국 정부에서 내놓은 새로운 추적 앱 (심지어 익명화된 데이터를 정부에서 손쉽게 실명으로 전환할 수 있는)을 다운로드하라고 페이스북에 공유한다. 동네 페이스북 커뮤니티에서는 오늘은 창문을 열어 보리스 존슨을 위해 박수를 치자고 사람들이 제안한다. 나는 창문을 닫고 빨리 이 곳의 위정자와 사람들에게 바른 방향을 인지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동시에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기로 결심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동안 확찐자가 되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대신, 다시 템즈 강변을 달리기로 말이다. 군생활 동안 상한 무릎이 여전히 말썽이지만, 천천히 달려도 재촉하는 이 없는 4월의 봄. 혹시나 내가 아시아인이어서 미워하는 이가 있을까. 얼굴을 가리려 가져간 마스크가 민망하게 지나가는 나를 보며 종종 웃어주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분에 이방인인 나에게도 이 곳의 봄은 아직 공평하게 따뜻하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 발병 초기를 제외하고는 외부에 알려진 이 곳의 인종차별 사례는 거의 없다. 아는 지인은 Furlough (일시해고)를 회사에서 받았지만 외국인임에도 정부에서 제공하는 기존 임금의 80%를 받고 있다. 영국 정부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Furlough를 받은 노동자나 영향을 받은 자영업자에게 기존 소득의 80% (최대 매월 £2,500)를 받도록 지원하고 있는데 전 국민에게 지원하고자 하는 우리나라의 방향보다는 현실적으로 생각된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까지 차별 없이 지원하는 영국에 비해 한국은 국내에서 일하고 있는 결혼, 영주권자를 제외한 외국인 노동자는 재난소득에서 재외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요즘에도 Waitrose에 장 보러 가면 그 곳의 스탭들이 아시아계 외국인인 내게 이래저래 말을 걸어주고 웃어줄 때가 있는데, 만약 동남아시아에서 바이스러가 났다면 한국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종종 한국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은 감사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렇게 우리도 이 곳의 누군가에게 봄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랄까.


오히려 가장 큰 고민은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더 늘었는데 더 재미있게 놀아주지 못한 것에 있다. 아이를 누군가에 손에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은 잠시, 게을러지는 나를 본다. 로봇놀이, 콩놀이, 책 읽기, 축구, 그림 그리기, 기타 치기, 펙펙펙, 듀플로, 춤추기, 노래하기. 매일 같은 레퍼토리로 놀아줘도 싫증내지 않고 까르르 웃는 아이를 보면 그 미안함은 더 커진다. 이제는 동네 친구 집이 어딘지도 알고, 친구와 놀고도 싶어 하는 나이가 되어가는 아이는 나도 모르게 내 게으름 속에 친구가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 속에 그래도 아빠 엄마랑 있을 때 가장 행복해 보이는 아이를 보며 괜찮은 거겠지, 생각한다. 조금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날이 오면, 동물원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하마와 악어를 보여줘야지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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