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이끼로 얄팍하게 물든 나지막한 계단이 있던 나의 여름 집
내 어린 시절의 어슴푸레한
아름다운 나의 여름 집이여.
-공간의 시학 중-
허름한 복도 나무 바닥 햇살이 가득 묻어 있다. 창 밖으로 여름 꽃 잎이 막 펴 오르기 시작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이내 살랑거린다. 그러자 나무 바닥과 나무 그림자도 조금씩 흔들린다. 그러자 탁, 탁 회색의 고양이가 앞 발로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눌러보려 하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다.
마름모 모양의 흰 타일들이 가지런히 놓인 욕실로 들어서니 막 말린 빨래 냄새로 가득하다. 찬장에는 정성스레 접은 수건들로 빼곡하다. 벽과 같은 흰 색의 창을 살짝 열어둔다. 누군가 샤워를 했는지 막 피어 오른 수증기들이 밖으로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옅은 커튼을 밀고 들어온다. 그 탓에 머리가 조금 헝클어졌다.
방으로 돌아오니 책상이 어지럽혀져 있다. 아마도 주인 없는 방에 회색의 고양이가 먼저 다녀간 듯하다. 투박하게 자른 연필, 흩어져 있는 지우개 가루, 읽다 펼쳐 놓은 몇 권의 책, 어설프게 쌓여 있는 공책, 지문이 찍혀 있는 노트북. 그리고 아무렇게나 갈겨쓴 몇 장의 메모지가 벽에 붙여져 있다. 책갈피를 넣어 덮고, 필기구는 연필 꽂이에, 지우개 가루는 손으로 쓸어 쓰레기 통에 버렸다. 침대 위에 펼쳐진 귀찮아서 개다 만 빨래를 마저 정리한다. 정돈된 이불 위로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꿈이 걸려있다. 파랑, 빨강, 초록 같은 여러 색깔의 비행기 모형이 달려있다. 집의 주인은 셋째 아들의 꿈이라 설명해주었다. 지금은 비행기를 타는 꿈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멋진 꿈을 가지고 있고 열심히 그 길 위에서 묵묵히 걷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 꿈 들 위로 나의 바람도 하나씩 올려본다. 파란 비행기에는 내가. 빨강 비행기 위에는 네가.
얇은 외투를 꺼내어 걸친 후 문 밖을 나선다. 고요하던 집 안과는 달리 밖은 이른 초여름의 소리로 가득하다. 유난히 길었던 올 겨울의 웅크림 탓에 사람도, 도시도 밀린 일을 하기 위해 여전히 바쁜 듯하다. 버스를 타고 갈까 하다 바람이 좋다는 이유로 걷기로 한다. 늦은 오후에 빵을 구워내는 냄새, 막 깎은 듯한 초여름의 풀 내음,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식당들의 맛있는 음식 냄새, 그리고 하루를 태우고 지나가는 노을의 내음까지. 그렇게 냄새에, 소리에, 풍경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다 보니 어느새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창가 넘어 나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당신이 있었고 그 옆으론 창위에 비친 에펠탑이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 조금 늦었지만 어여쁜 꽃 한 송이를 준비하였으니 그 핑계로 지각의 용서를 구해야겠다.
특별할 것 없는 어느 초여름의 밤, 파리에서 적은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