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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여행이 끝나는 곳의 이름

by 흰남방




기분 전환이라도 하기 위해 맥주병에 가까운 사람이 그것도 한 겨울에 수영장을 가기 시작하는 것은 무거워진 몸이라도 조금은 가볍게 살아가 보겠다는 발버둥이었다. 일시적이라도 이러한 방법이 안 먹힐 때가 있다. 잘 버티던 마음이 유달리 지치고 힘든 순간. 처음에는 잠을 자는 시간을 늘리기도 해 봤고 산책길을 바꿔 보기도 하였다. 친구들을 만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잠시 잊을 수 있었지만 마음의 피곤이란 게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무의식처럼 하던 게 있다. 인터넷에서 비행기 표를 조회해보는 일. 눈이 많이 내리는 곳에 다녀올까. 따뜻한 나라에서 부족한 온기를 채우로 다녀올까. 아니면 예전부터 가고 싶던 마추픽추를 보러 떠나볼까.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사지 못하는 비행기 표로 세계일주를 한다. 집을 떠나면 고생이니 결국 떠나지 않을 거라는 의미 없는 위안거리를 삼으며 조회 창을 닫는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나의 세계 여행은 목적지가 항상 바뀐다. 목적지 목록에는 가보지 못한 곳이 대다수이지만 다시 가고 싶은 도시도 있다. 세계를 돌아 마지막 목적지는 늘 제주. 출발지와 경유지는 늘 다르지만 마지막은 항상 제주로 향한다.




처음 비행기를 타본 것은 어릴 적 제주로 향하는 어느 봄 날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눌리는 몸의 느낌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날이기도 하였다. 가끔 여행 짐을 한껏 꾸리면서도 떠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때가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몸을 짓누르면 그제야 어디로 떠난다는 감정이 기억 저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모든 여행의 출발이 공항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행기 표를 찾아보는 일은 떠남에 대한 갈증이며 마음의 피로에 대한 저항 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많은 걱정과 끊김 없는 고민들이 예고 없이 덮칠 때. 그것들이 너무나 무거워 버겁기까지 할 때. 이렇게 비행기 표를 검색하며 세계일주를 시작한다. 비록 당장 떠나지는 못하지만 언제든지 그렇게 하겠다는 예상 할 수 없는 계획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생각보다 일상에서 다시 나아갈 힘을 가져다 준다.


이러한 버릇이 생기기 전 자주 들어가는 항공사 검색창에는 파리와 인천으로 여행 구간이 자동 설정되어 있었다. 여름마다 한국에 들어간 탓이기도 하였고 당신이 보고 싶다는 핑계로 애꿎은 인터넷의 새로고침만 무수히 누르면서 가격이 내려가길 기다린 적도 있다. 그러다 비행기 티켓 조회로 세계를 여행하는 버릇이 생기면서부터 검색에 설정된 나의 도착지는 바뀌게 되었다.

홀연히 떠나고 싶을 때, 설정된 목적지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 만큼이나 자유로운 사람이 되리라.




도착지 : 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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