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보통날
“버킷리스트를 보다 행복리스트를 적어보는 게 어떨까?”
무더운 여름날 파전 한 접시를 두고 막걸리를 마시다 무심결에 한 말이다. 예전 군 생활을 할 때 자그마한 공책에 무언가를 적었다. 애초에 일기를 쓰려했으나 매일 힘든 일과에 지쳐 10시만 되면 순식간에 잠들어 버리는 나에게는 무리였다. 결국 남은 종이 위로는 전역 후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 적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휴가. 여느 대학생들처럼 봉사활동, 공모전 등 다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눈에 띈 것은 ‘멘토링’이라는 자원봉사이었다. 저소득층 학생들을 대상으로 ‘멘토-멘티’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흔한 과외식의 수업이 되어도 좋고, 미술관이나 유적지 등을 다녀오는 문화체험도 괜찮았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수직적 관계보다 친구 같은 수평적 관계이었다. 무엇을 전해주고 알려주는 것도 좋지만 공감해주고, 자신의 편이 생기므로 인하여 자신감을 얻길 바라였다.
전역 후 하고 싶던 일들 중, 자원봉사도 있었기에 지원하였다. 간단한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 자격이 주어졌고 어릴 적 북에서 왔다는 앳된 한 소년을 만나게 되었다. 해당 기관과 1년의 계약을 했었지만 프랑스로 떠나야 하는 탓에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였다. 당연히 그 소년과 약속한 시간 또한 다 보내지 못하였다. 봄과 여름이라는 두 계절 동안 2주에 1번씩, 한 번 볼 때마다 2~3시간 정도의 시간을 함께 보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늘 해맑게 웃던 그 소년의 웃음은 되려 나의 기분을 좋게 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요즘처럼 더운 한 여름, 2박 3일 포항 어느 바닷가에서 보낸 여름캠프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꼭 다시 연락 하자라는 약속과 함께. 그 이후, 프랑스로 오게 되었고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기 위해 정신없이 시간을 쓰다 보니 까맣게 그 소년을 잊고 지내었다.
프랑스에서 처음 맞이하게 된 겨울. 처음 만나보는 색다른 추위에 적응 중이었고 그 와 중 ‘멘토링’ 프로그램이 무사히 끝났다는 소식이 한국에서 들려왔다. 그제야 소년이 걱정되었다. 혹시나 상처받지는 않았을지.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내가 간 뒤로 후임으로 오셨다는 분이 꽤 힘들어하셨다고. 혹시나 싶어 그 이유를 물으니 그렇게 떠나온 이후로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지도, 잘 웃지도 않았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그 앳된 소년의 미소를 잃게 된 것이 나의 탓은 아닐까.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한동안 마음이 체한 것 같았다.
무더운 여름이 찾아오면 그 소년의 미소가 떠오른다. 까무스름한 피부와 또래에 비해 자그마한 키. 유달리 축구를 좋아하여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앳된 그 소년이. 딱히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그 날들의 온도가 왠지 오늘과 비슷하여서. 소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자그마한 공책에 적힌 나의 바람 때문이다. 그 바람이 누군가의 상처가 될지는 그때는 몰랐다. 그 이후로 버킷리스트를 적는 것을 이내 그만두었다. 그러다 며칠 전 무심코 그 공책을 보게 되었다. 책장 어딘가 꽂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굳이 꺼내어 보진 않았다. 초대한 친구가 공책을 보고 무엇이냐 묻기 전 까지는. 첫사랑과 손잡고 바닷가 거닐기. 김연아 선수와 친구가 되기. 아이슬란드의 오로라를 흰 눈에 누워 가만히 바라보기. 그런 시시콜콜한 바람을 적은 공책이라고 말하였다. 이 중 한 것들이 있느냐 라고 묻는 친구의 질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그런데 버킷리스트에 적은 항목을 하나씩 지워나가도 꼭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덧 붙여 말해주었다.
버킷리스트에 적는다고, 그것을 이루어낸다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니더라. 당연히 말 그대로 소망 목록이니. 모든 소망의 성취가 꼭 행복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오는 건 아니지 않은니깐. 그러면 행복 리스트를 적어보는 건 어떨까. 과정과 결말이 모두 꽤 괜찮은 행복 리스트. 진부하고 뻔해도 그러한 것 쯤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살아가는 게 필요하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파전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무심코 던진 나의 질문의 우리의 결론은 간단하였다. 그 결론으로 규칙을 세워보기로 한다.
규칙 1. 일상 속,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는 것에 있다면 즉시 리스트에 적어 둘 것.
규칙 2. 무언가를 행하여 행복해질 것 같다 라는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은 피할 것.
규칙 3. 행복할 때 그 순간을 아낌없이 표현할 것.
규칙 4. 그 행복들을 반복하여 볼 것.
소확행(小確幸) ; 작지만 확실한 행복.
요즘 행복에 관하여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아닐까. 행복 리스트는 소확행에 해당되는 것들을 굳이 적어 내려가는 리스트이다.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스트레스가 왔을 때, 나의 행복이 무엇이였는지 조차 까마득해질 때, 그 공책을 열어 행복해지기 위한 하나의 레시피 인 샘이다. 그래서 오늘이 행복했기에 내일도 오늘과 같은 여느 보통날이길.
집으로 가는 길. 오래 두고 사용할 수 있는 표지가 두꺼운 공책 하나를 구입했다. 그 공책에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길 바라면서 첫 번째 장, 누군가의 이름 석 자를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