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보통날
꽃가게에서 실습생으로 일하는 그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꽃을 정리하고, 손님들을 맞이한다. 좋아서 시작했고, 여전히 꽃을 다루는 일에 만족한다. 하지만 문제는 늘 반복되는 그녀의 삶이 지루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름다운 곳에 살지만 그 아름다움을 잊고 지내고, 향긋한 꽃 들 도 그녀에겐 또 다른 하나의 숙제처럼 다가왔다.
눈부신 하늘을 보여주는 요즘 같은 날, 길고 좁은 가게 한편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는 그 풍경조차 하나의 시샘이 되었고 그것은 슬픔이란 가면을 쓰고 다가왔다. 천 개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그 도시에서, 그녀는 하필 슬픔이란 가면을 마주 보고야 말았다. 그래도 좁고 긴 공간, 그 끝에서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누군가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달래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흐릿한 그 ‘누군가’는 요즘 그녀에게 안부를 묻는 그 사람이라면. 그러면 자신이 다듬고 있던 꽃을 권하며 향기를 한 번 맡아보라 수줍게 말 하진 않을까 라는 그러한 실없는 상상을 하며 이내 피식 웃고 만다. 그 사람을 생각하니 오늘은 왠지 거리의 바람이 달달 할 것 같은 느낌이 든 그녀는 작은 꽃 한 다발을 만들어 볕이 잘 드는 벽난로 위에 올려 두기로 하였다.
그 이후로 비가 내리고 해가 뜨기를 반복, 4월 23일이 찾아왔다.
그 에게는 1년 중, 유일하게 가슴이 미어지는 날. 그래서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 묻어 둔 날이다. 매년, 그 날이 올 때 면 남자는 혼자서 술을 마셨다.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저 책 한 권과 함께 아침의 새들이 기저귀 펴는 소리가 그의 집 중정에 울리고 나서야 차가운 침대 위로 쓰러지 듯 잠에 들었다. 그러다 올해는 술 대신 식탁 위에 꽃을 두고 근사한 한 끼를 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근처 시장에 가 고기 한 덩이, 야채, 사과 그리고 바게트 하나를 샀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이탈리아 이 졸라 벨라(Isola bella)라는 섬에서 우연찮게 사게 된 하얀색의 탁자보를 넓게 펴고, 빈 병에 물을 채운 후 꽃을 꽂고 요리를 한 후 붉은 와인 한 잔과 함께 창을 마주 보고 앉았다. 길고 높은 창 덕에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충분히 밝은 공간이었다. 열린 창 밖에서는 꽃가루가 흩날려 들어왔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 그 보다 얇은 커튼 뒤로 풍겨오는 달달한 바람에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