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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제혁 Mar 20. 2022

복분자주스

복분자, 장미과의 복분자 딸기의 채익지 않은 열매로, 이것을 먹으면 요강이 소변 줄기에 뒤집어진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딸기나 수박 등의 과일은 좋아하지만, 복분자를 따로 먹은 적도 거의 없고, 편의점에 다른 음료수와 함께 진열되어 있을 때, 나는 한 번도 이 음료수를 집어본 적이 없었다. 대학생 때,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복분자 술을 먹고 안 좋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동안 내 인생에서 그다지 좋은 이미지가 없던 복분자는 2021년 8월 27일부터 나에게 한 분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2021년 3월, 74세 여자환자가 우상복부 통증으로 병원에 방문하였다. 검사결과 담낭염과 담도염이 같이 있어 내시경적 역행성 담췌관 조영술(ERCP) 라고 불리는 시술을 통해 담도의 염증을 치료한 후 외과에 의뢰하여 담낭수술을 받았고, 환자는 수술 후 퇴원하였다. 담도의 협착이 있으나, 양성 협착으로 판단되어 외래에서 추적관찰을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환자는 3개월 후 발열 및 우상복부 불편감이 있어 다시 내원하였고, CT 를 시행하였을 때 우측 간에 약 8.4cm 크기의 큰 간농양(liver abscess)을 확인하였고, 이전과 비슷하게 담도의 협착이 의심되었다. 간농양과 담도간에 연결이 있는 지 확인하기 위해 ERCP 를 시행하였고, 담도와 농양간의 연결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담관의 배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담관에 관을 거치하였다. 염증수치(CRP) 가 34.43 mg/dL 로 정상수치 (0.5 mg/dL) 보다 높게 상승되어 있고, 환자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보호자와 상의하여 중환자실 입실을 결정하고 간농양에 대해 경피적 배농술(간농양을 몸 밖으로 빼는 시술)을 영상의학과에 부탁하여 시행하였다. 
 환자는 시술 후 심한 통증을 호소하였고, 관을 손으로 잡아 빼려고 하였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보호자 동의 하에 손과 발을 억제하였다. 환자를 화를 내며 나에게 말하였다.
 “왜 이전에 치료를 제대로 안 해줘서 날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 나 이 관 빼고 집에 갈꺼야! 선생님 잘못이야!” 
 환자의 마음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였으나, 계속 이런 말을 듣다 보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물론 매우 드물게 수술 후 발생할 수도 있으나, 이전 내시경 치료와 담낭 수술은 환자에게 꼭 필요했고, 간농양의 발생 원인인지는 알기 어렵다고 환자와 보호자에게 설명을 하였다. 
 다행히 환자는 잘 회복되어 일반병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농양의 크기가 컸기에, 농양내의 관의 위치를 바꾸는 시술이 여러 번 필요하였고, 환자는 그때마다 나에게 불평 불만을 하였다. 결국, 나도 3번째 시술 때 환자에게 한마디를 하였다. 
 “김** 님. 시술할 때 힘든 거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처음 오셨을 때보다 지금 많이 좋아지지 않았나요? 제가 이렇게 신경 써서 치료하는 데, 저에게 이렇게 매번 불평불만을 늘어놓으시면 저도 힘들어요.” 
 그동안 크게 뭐라고 안 했던 의사가 갑작스럽게 말하니 환자도 놀랐을까? 환자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하였고, 나는 시술 잘 받고 오시라는 한 마디만 더 드리고 회진을 마쳤다. 이후, 환자분이 더 이상 불만 표시 없이 시술을 잘 마쳤다는 보고를 받았다.
 다음 날, 회진을 돌 때 환자에게 “어제 힘들지 않으셨어요?” 라고 물어보면서 배액관이 잘 나오나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환자의 손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선생님, 어제 정말 미안했어요. 제가 선생님 고마운 줄 모르고, 제 말만 계속 했던 거 같아요. 선생님이 매일 회진 돌면서 저 챙겨주시고, 좋아지게 해주셨는 데, 정말 미안합니다…”
 환자는 울면서 말을 하였고, 그 분의 진심이 느껴졌다. 환자에게 제가 꼭 낫게 해드리겠다고, 걱정하지 마시고 조금만 힘내라고 말을 하면서 손을 꽉 잡아드렸다. 아프지 않게. 
 환자는 약 1달간의 입원 후 퇴원을 하였다. 간농양 원인이 명확하지 않아 대장내시경을 약 1달 후에 시행하였고, 횡행결장에 약 1 cm 크기의 큰 용종이 있어 제거하였다. 
 2021년 8월 27일, 김** 환자의 조직검사를 확인하는 날이었다. 조직검사 결과 용종은 몇 년 후에 암이 될 수 있는 선종으로 나왔고, 설명을 드렸다. “김** 님. 다행히 용종은 암이 아니고 선종으로 나왔어요. 선종은 나중에 암이 될 수 있는 데, 크기도 커서 2-3년 후에는 대장암이 되었을 거 같아요. 이번에 고생하셨지만, 그래도 검사를 안 했으면 나중에 암으로 수술할 뻔했어요. 정말 다행입니다.” 환자는 내 설명을 조용히 듣더니 큰 통에 넣은 주스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이런 거 환자에게 받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환자의 말을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나 농사진 것도 가지고 왔는 데, 입구에서 병원내로 가지고 오면 안 된다고 해서 그건 병원 현관에 놔두고 왔어요. 이것도 안 받아주면 나 정말 선생님한테 미안해서 안 돼. 시골에서부터 70대 노인이 끙끙 대며 들고 왔는 데 안 받아줄 거에요? 내가 집에서 복분자로  복분자 원액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 데...받아줘요. 그리고 생판 모르는 늙은이 구해준 거 너무 고마워요. 나 또 눈물나려고 하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환자가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환자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이었다.
 달달하고 새콤한 맛의 복분자주스는 나에게 평생 떠올리게 할 것이다. 묵묵히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하면 결국엔 환자도 의사의 마음을 알고 고마워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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