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Mar 30. 2017

그가 울지 못했던 이유

니시카와 미와의 '아주 긴 변명'

영화 공간 주안에서 영화를 봤다. 주안은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자주 왕래하던 동내다. 거리는 거의 변한 게 없었다. 여기저기 나이트 전단이 나뒹굴었고 도로 인도 할 것 없이 거리는 지저분했다. 여고생들이 욕을 하며 담배를 피는 풍경도 변함 없었다. 한때 중심지 였던 지역의 쇠락한 오늘을 보는 기분이었다. 극장은 오래된 느낌이 들었다. 생긴 지 몇년 되지 않은 걸로 알고있지만 오래된 극장에 온 것 같았다. 그래도 인천에서 CGV를 제외하고 인디, 아트 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하는 곳이다. 오래되지 않았지만 오래된 냄새를 풍기는 것은 아마도 영화가 지닌 정취가 무게를 더해서일 것이다.


영화는 사고로 아내 나츠코(후카츠 에리)를 잃은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와 같이 목숨을 잃은 나츠코의 친구 유키(호리우치 케이코)의 남편 요이치(타케하라 피스톨)가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사치오와 요이치는 정반대의 삶을 살던 사람이다. 가령 사치오가 소설가인 것과 달리 요이치는 밤새 고속도로를 다리는 육체 노동자 운전 기사고, 사치오가 번지르르하게 이성적으로 말은 하는 반면 요이치는 직설적이고 투박하다. 슬픔을 대하는 태도도 정반대다. 사치오는 가볍게 흘려보내지만 요치오는 아내의 메시지를 저장한다.  


사치오와 요치오의 병렬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화는 철저하게 사치오에 집중한다. 인터넷에 자신을 각종 연관 검색어로 검색해보는 장면, 취업도 못한 채 빌빌 거리던 때, 헤어 스타일리스트로서 기세 등등했던 나츠코를 회상하는 보이스 플래쉬백 등 영화는 사치오의 묘사에 공을 들인다. 심지어 사치오는 나츠코가 죽는 날 외연녀인 치히로(쿠로키 하루)와 섹스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찌질이다. 콤플렉스 가득한 자기 혐오의, 어떻게도 되지 않는 캐릭터다. 사치오는 사치오란 인물을 혐오하는 자아로서의 인간인 것이다. 그러니 그가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은 버릇 없기 그지없다.


'아주 긴 변명', 그런데 무엇에 대한 변명인가. 영화에는 폭 넓은 수채화 같은 바다 장면이 등장한다. 사치오와 요치오, 그리고 요치오의 자녀들이 뛰노는 대목이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기도 하다. 동시에 사치오의 변화를 암시하는 장면이다. 아이들이 불어대는 비눗방울이 바다 위로 흘러퍼지고 하늘로 치솟아 터지고 만다. 그리고 이 장면은 불꽃 놀이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사치오는 자신의 결여를 깨달은 것일까. 비누 방울처럼 구멍난 자신의 자아를 직시하게 된 것일까. 사치오는 요치오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레 변해갔다. 결여가 불러온 새로운 환경에, 간과하고 살았던 자신의 순직한 모습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사치오가 장례식에서 울지 못한 이유는 아픔을 아픔으로 마주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그가 자신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약점을 직시하는 과정을 매우 부드럽게 연출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변명은 왜 울지 못했는가에 대한 변명이다.


북쪽의 설산이 첩첩이 이어진다. 사막같은 호수가 검은 빛으로 일렁인다. 성냥갑 같은 단지를 하늘 위에서 비추며, 기다란 동굴이 롱숏으로 보여진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광대한 풍광을 여러차례 인서트 숏처럼 끼어 넣는다. 그리고 이는 나약한 바보 같은 인간의 삶을 무한한 세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주 긴 변명>의 원제는 永い言い訳이다. 물리적으로 '길다'를 의미하는 길 장(長)이 아니라 '심오하고 깊다'는 의미의 영원할 원(遠)이다.


영화의 후반부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운전 사고가 난 요치오를 마중하는 사치코와 신페이의 장면을 보여주며, 둘과 사치오 사이를 떼어 놓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소실점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다란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나가는 사치오의 뒷모습이다. 그는 이제서야 제대로 한 명의 사람이 된다. 사치오는 기나 긴 성장을 거쳐 마침내 변명에 마침표를 찍는다.


영화가 끝나자 배가 고파왔다. 뭐라도 먹을까 싶었지만 눈에 띄는 게 없었다. 버스 정류장이 꽤 가까워 마음을 접었다. 19분. 대기 시간에 19란 숫자가 쓰여있었다. 너무나 늦어져 혹시나 엄마가 걱정할까 싶어 전화를 걸었다. "다른 건 없어? 갈아 타더라도 그게 낫지." 알아서 하겠다고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한번만 갈아타면 집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대기 시간이 잠시 후다. 잽사게 탔다. 그런데 이상하다. 두 서 정거장 지났을 즈음 문제가 벌어졌다. 양 옆의 풍경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보지 않은 동네였다. "농수산물 가나요?"라고 묻자 "안 가는데"라고 뒤에서 한 아주머니가 말한다. "망했다" 싶었다. 타는 정류소가 틀렸던 것이다. 결국 버스를 다시 탔다. 예전에 자주 타던 번호다. 버스는 거의 모든 동네를 방문 하듯 뱅뱅 돌았고 시간은 네시를 훌쩍 지나 다섯시를 향하고 있었다. <아주 긴 변명>을 본 날 정말로 아주 긴 여정을 한 셈이다. 신기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나간 날들을 보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