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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r 30. 2017

이병헌의 침묵, 그리고 모노 드라마

자조와 후회, 그리고 미안함. 싱글라이더.

"그에게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영화의 이 카피처럼 <싱글라이더>는 쓰나미가 스쳐간 한 인간의 삶을 훑어나가는 영화다. 채권 회사에서 증권맨으로 일하는 강재훈(이병헌)은 회사의 부실 채권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게된다. 고객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리고 어떻게 좀 봐달라고 애원을 한다. 꽤나 심란한 처지다. 심지어 그는 싸대기도 맞는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호주에서 그와는 따로 아들 진우(양유진)와 함께 살고 있는 아내 수진(공효진)은 귀국 일자를 일주일 연기하겠다고 말한다. 재훈은 수진과 통화를 하며 언성을 높인 후 전화를 끊고 이후 항공권을 구매해 호주로 떠난다. 당연히 이야기는 수진에 집에 찾아간 재훈이 수진과 대면하는 장면일 거라 생각되지만, 영화는 외간 남자 크리스(잭 캠벨)와 함께 있는 수진의 모습을 보고 집 주위를 맴맴 도는 재훈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CF 감독 출신의 영화답게 <싱글라이더>는 호주의 바다와 하늘, 그리고 일상을 감각적으로 잡아낸다. 그리고 동시에 재준을 묵직한 피사체로 그려낸다. 영화에서 재준은 굉장히 건조한 느낌으로 비치는데 바싹 마른 낙엽의 바스락거림이 스산하게 일렁이는 것만 같다. 그는 난처한 상황에서 이도저도 하지 못한다. 자신이 권유한 채권이 불량이었음에 "죄송합니다"란 말밖에 할 수 없고, 자신이 가라고 한 아내의 호주 행이었기에 "후회한다"고 읊조릴 수 밖에 없다. 수진의 집을 등 뒤로 하고 나온 재훈은 걷고 또 걷는다. 그는 인생의 길을 잃었다.  

배우 이병헌은 이 영화에서 대사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다 합쳐봐야 서른 마디가 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는 감정을 침묵으로 연기한다. 특히 그가 수진의 침대 곁에서 분노와 증오를 자신의 책임감으로 억누르는 장면은 보는 이를 울컥이게 할 만큼 울림이 크다. 이병헌의 침묵엔 허망한 자조, 후회 그리고 미안함이 있다.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 반전 카드를 내민다. 여태껏 애써 쌓아놓은 감정과 드라마를 뒤흔드는 장치다. 하지만 이 순간과 동시에 영화는 붕 떠 허망한 뭉게구름이 되고 만다. 보는 입장에선 기다릴줄 아는 연출로 공들여 수놓은 감정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굳이 반전이 필요했을까 싶어지는 포인트다. 게다가 수진의 강아지 치치의 죽음도 불필요해 보인다. 치치의 죽음이 이야기의 얼개와 연결되는 지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이유 없이 강아지를 죽이는 영화를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영화가 혼자가 된 재훈의 타즈마니아 행을 응원하듯 비추는 대목은 아름답다. 이병헌의 무게가 더해저 진한 울림을 준다. 진득한 멜로를 예상했으나 허망한 한 남자의 드라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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