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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이런 슬픔도 있다

히로키 류이치의 일흔일곱 번째 영화 '그녀의 인생은 잘못이 없어'

by MONORESQUE

세상엔 이런 슬픔도 있다. 침묵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슬픔, 힘내라는 말조차 죄스럽게 울리는 슬픔,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미안해서 어찌할 수 없는 슬픔. 히로키 류이치 감독의 일흔일곱 번째 영화 '그녀의 인생은 잘못이 없어'를 보았다. 영화는 원전 사고 이후 후쿠시마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아픔과 절망, 상처와 고통을 바라보는 자세가 애절하게 가냘프다. 미유키(타키우치 쿠미)는 시청에서 일하는 평범한 20대 여자다. 엄마는 츠나미에 쓸려가 시체도 발견되지 못했고 아빠는 매일같이 술에 파친코다. 그러니까 그녀의 가정은 무참히 무너져내렸다. 그 안에서 미유키가 찾은 유일한 길은 성접대. 그녀는 주말이 되면 도쿄에 가 남자들을 상대한다. 영화는 고속 버스를 타고 도쿄에 향하는 미유키를 수차례 비추는데 그녀의 표정이 후쿠시마의 상실을 이야기한다. 재로 변해버린 논밭과 폐허가 된 주택들, 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저 보통의 일상을 살고있는 도쿄. 히로키 감독은 두 장소, 두 장소에서의 미유키를 대비하며 아픔의 무게를 던져준다. 가슴이 턱 막혀오지만 우리게에 그 무게를 실감할 감정은 없다. '그녀의 인생은 잘못이 없어'는 우리의 감각, 감정, 삶을 초월해 자리한다. 세상에는 이런 슬픔도 있다.


영화의 문을 여는 건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살았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마을의 풍경이다. 실제로 후쿠시마에 들어가 20여일의 촬영을 한 이 영화는 현실과 영화 사이의 문턱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다. 감독은 물론 배우들도 작품을 위해 취재를 했다고 하는데 영화는 우리가 영화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영화가 우리에게서 무엇을 보는지를 생각케 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지금의 후쿠시마,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후쿠시마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시선에서 영화는 일상을 살아간다. 미유키는 아침에 일어나 인사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지으며, 아빠와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러니까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 영화에는 요리를 하는 장면, 식사를 하는 장면이 수 차례 등장하는데 매 장면 장면이 간절하고 소중하다. 특히 미유키가 성접대를 알선하는 미우라(코라 켄고) 앞에서 옷을 벗으며, 울음을 터뜨리고져 '이 일이 정말로 하고 싶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소리치는 장면은 안에 쌓인 아픔을 토해 내려는 몸부림으로 비쳐져 가슴이 미어진다. 미우라는 말한다. '너를 특별히 보호해주겠다는 게 아니야. 이건 그냥 일이야'라고. 그냥 일, 그냥 사는 것, 그냥 숨 쉬는 것. 영화는 거창한 부흥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녀의 인생은 잘못이 없어'는 부흥을 북돋는 캠페인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사는 것의 소중함을, 그것의 애절함을, 상처에 가려진 일상의 자락을 조심스레 내비친다. 영화가 현실에 내비친 한 자락의 빛이다.


미유키를 연기한 타키우치 쿠미의 인터뷰를 통역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두 가지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하나는 가설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가 말했다는 '거짓말 하지 말고 살아'라는 말이었고, 또 하나는 실제로 사람이 살고있는 가설 주택에서 촬영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영화는 스산하다. 서늘한 느낌 그 자체다. 안개가 자욱히 깔린 오프닝부터 시작해 영화는 시종일관 스산한 공기 속을 유영한다. 그리고 이 스산한 느낌 자체가 후쿠시마의 지금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 위로의 말을 더할 수 없는 아픔, 섣불리 힘내자고 독려할 수 없는 분위기가 후쿠시마의 지금이다. 그러니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안개 속을 헤매인다. 나는 여기에 이 영화의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환기시키는 것, 영화가 현실에 기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영화는 비극을 말하지 않는다. 비극의 자리에서 일상을 바라본다.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지나가고, 다시 다가오는 무언가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길에서 희망이 보인다. 미유키의 아빠는 엄마의 옷가지를 바다에 보내며 아픔을 해소하고, 미유키는 미우라의 연극을 보고 일상을 재생한다. 그러니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세상에는 이런 슬픔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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