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노미야 류타로 감독의 영화 '그 남자, 류타로'의 못된 얼굴
스산함이 느껴지는 공터, 홀로 있는 남자. 담배를 피우며 무얼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로 허공을 응시한다. 날 것의 생경한 오프닝. '그 남자, 류타로'의 시작이다. 영화는 주인공 류타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간다. 여기서 '쫓아가다'는 말은 수사가 아닌, 말 그대로 물리적 수식인데 카메라는 심지어 인물이 화면을 빠져나가도 자리를 지켜낸다. 영화는 이런 장면을 수십차례 반복한다. 손을 씻고, 라면을 먹고, 섹스를 하고, 욕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여느 사람들의 일상과 별 다를 바 없는 시간이 스크린의 시간을 채워간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듯 멈춰 설 수 밖에 없다. 류타로는 팔다리가 다른 이들에 비해 짧은 선청성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구현하는 평범한 일상은 우리에게 이렇게나 생경하다.
감독 본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주인공을 연기하기도 한 '그 남자, 류타로'의 일본 원제는 '에다하노 코토(枝葉のこと), 지엽이다. 나무의 뿌리나 기둥이 아닌 줄기나 가지 등을 의미하는 이 말은 어찌돼도 상관 없는, 그러니까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동시에 류타로의 인생에 대한 비유다. 영화는 후회를 얘기한다. 카메라가 인물이 떠나간 자리를 수십 초 가량 지켜보는 것은 후회를 담기 위함이다. 류타로가 지나간 자리엔 항상 후회가 남아있다. 아니, 류타로의 인생은 후회를 품고 태어났다. 니노미야 류타로 감독은 영화를 다큐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밀착시킨다. 영화엔 음악이 일체 흐르지 않고, 소리가 적으며, 류타로는 거의 항상 무표정이다. 그리고 이 무심하고 삭막한 분위기가 우리를 짓누른다.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종류의 감정이다.
영화는 엄마를 일찍이 잃고 혼자가 된 류타로를 마치 친아들인냥 돌봐주던 여자 류코의 죽음을 품고있다. 류타로는 류코를 찾아가 인사를 하고 눈시울을 붉히는데 무표정의 영화가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영화에 사건은 없다. 류코의 병이라는 극적인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저 류타로의 일상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갈 뿐이다. 하지만 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일상의 흐름은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장애인은 무조건 선량해야 한다는 편견, 장애인의 일상은 무조건 소박하고 청결해야 한다는 선입견. 류타로는 이들을 부수며 살아간다. 나아가 장애인이라고 마쵸적 남성이지 말라는 법이 있냐고 말하기라도 하듯 여성 비하적 발언도 퍼붓는다. 그리고 그는 욕설과 함께 폭력을 당한다. 주기적인 폭력, 류타로의 일상이다.
영화는 힘이 든다. 류타로가 구타를 당하고 있을 때 그를 구해줄 음악은 흐르지 않는다. 우리는 무기력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류타로를 무조건적인 피해자로 그리는 건 아니다. 영화는 류타로의 화, 폭력, 변태 행위에 가까운 성행위도 빠짐없이 담아낸다. 아마도 여자 관객들에게 혐오 반응을 가져올 류타로와 술집 여자의 섹스 신은 이 영화가 한 남자의 인생을 무난하게만 그리지 않을 거라는 의지를 보여준다. 섹스 후 여자에게 폭력을 당한 류타로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바라본다. 왼쪽 옆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본 얼굴이 카메라에 비치는데 나는 여기서 이 영화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자신의 화, 폭력, 변태 행위에 가까운 성행위를 바라보는, 그러니까 치부를 포함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114분의 시간. 시종일관 그를 봤지만,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한다. #bi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