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시 요시유키 감독의 '황야'가 보여주는 죽음 곁의 삶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다. 자신이 엄마에게 왜 버림 받았는지 모르고 아빠가 왜 목 매달아 세상을 떠났는지 모른다. 높은 청년 실업률과 자살 문제로 세상이 기울어진 시간, 2021년. 영화 '황야'는 미래를 빌려 현재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죽음이 짙게 드리워진, 삶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현실이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신지는 어릴 적 엄마에게 버림 받은 아이다. 켄지는 엄마의 죽음 이후 아빠와 함께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아이다. 두 남자의 삶은 처음부터 아픔을 품고 있었고,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러니까 둘은 삶보다 죽음 가까이에서 태어났다. 영화는 이 두 남자가 우연히 복싱과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시간을 그린다. 희망이란 병을 갖고 살아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사는 거보다 죽는 게 더 장사가 되는 험악한 세상을 무대로 둘은 삶이란 단어를 꺼내본다. 전형적인 스포츠 드라마의 도입부다. 하지만 영화는 이 둘을 2021년이란 시공간에 데려다 놓으면서 이들의 삶을 성취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낸다. 신지와 켄지는 지나간 시간을 치유하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산다.
영화가 제시하는 2021년은 돈과 국가, 그리고 시스템의 권력이 소용돌이치는 시대다. 경제적 징병제의 도입이 거론되고 자살 방지를 위한 프로그램이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소개되는 현실은 개인의 의지와 자유에 어둠을 짙게 드리운다. 더불어 영화는 자살이란 행위를, 죽음이란 행위를 삶 속에서 사고한다. 아파서, 괴로워서, 견디다 못해서 선택하는 죽음과 살아온 삶에 만족하며 선택하는 죽음을 나누어 얘기하고 무엇에 가치가 있는가를 묻는다. 영화에는 자살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조직이 등장한다. 이들은 사형대를 닮은 단상을 만들어 자살 희망자들을 세운 뒤 이들에게 마지막 생각을 묻는다. 하지만 거의 모든 자살 희망자들은 자살을 포기한다. 더듬어본 삶의 끝에 마주한 세상은 공포와 두려움, 절망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결혼식장이 장례식장이 될만큼 돈이 모든 걸 좌우하고, 삶은 여기저기 구멍 투성이에 곪아 터졌더라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래도' 산다는 것. 신지와 켄지 처럼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무수히 많은 소름이 돋았다. 가장 처음은 말을 더듬거려 사회 생활이 서툰 켄지가 복싱이란 세계를 만나 자신의 재능을 알게 됐을 때 수줍게 미소짓는 얼굴을 보면서, 그 다음 순간은 신지와 켄지, 그리고 둘을 체육관으로 데리고 온 트레이너가 둘의 이름을 각각 신주쿠 신지와 바리깡 켄지라고 지어주던 때, 그러니까 둘이 복서로서 다시 태어나던 때, 그리고 무수히 많은 복싱 장면에서 둘의 펀치가 빗나가거나 상대의 육체를 타격했을 때 발생하는 애잔한 강렬함과 비통한 세월이 부딪혔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켄지가 신지에게 편지를 보내며 눈물을 떨굴 때 나는 이 영화에 깊숙히 빠져들었다. 신지는 복수를 위해 복싱을 한다. 켄지는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 복싱을 한다. 이들에겐 복싱을 해야만 하는 동기가 있다. 여기까진 전형적인 스포츠 드라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둘의 복싱을 죽음과 마주하게 하면서, 아픔의 시간 안에 놓으면서 외연을 확장한다. 복싱에선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상대를 미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증오와 미움으로 작동하는 운동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둘은 끝내 이를 해낸다. 복싱에선 뒤 돌아보지 말라는 말도 한다. 뒤 돌아보면 '꿈 투성이'고, 거기엔 실패한 꿈, 갈기갈기 조각난 꿈, 아직 다 자라지 못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마주한다. 경제적 징병제 논란 속에서 펀치를 날리고, 간호 서비스 시스템의 개편 곁에서 고함을 지른다. 그러니까 싸움을 쉬지 않는다. 그리고 이 305분 동안의 투쟁은 우리게에 그래도 살아가라고 말한다. 아무 것도 아닌 듯 그저 살아가는 모습, 그 안에서 우리는 위안을 본다.